타이타닉호 침몰과 촛불정치

[노대홍의 한 끗 차이생각(581)]

2016-12-26 06:41:42
1912년 4월 14일 밤 12시 5분 타이타닉호 선장의 퇴선 명령이 내려졌다. 그날 밤은 달이 뜨지 않았다. 만약 달이 떴더라면 해면감시원 두 명이 옆에 떠있는 유빙을 발견했을 것이다. 배와 함께 최후를 마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 이보다 앞선 1907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상상할 수 없다. 현재 조선기술은 이미 그 수준을 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 이중격실 공법을 적용한 타이타닉호의 별명이 절대 침몰될 수 없다는 ‘불침선(不沈船)’이었다.

촛불이 두 달째 광화문 거리를 메우고 있다. 다수의 힘에 밀린 언론은 하나같이 참여자 숫자를 뻥튀기하여 100만으로 시작했다가 이젠 200만을 넘었다고 보도한다. 무안했던지 처음엔 광화문의 숫자라 하더니 나중엔 전국이라 했다가 마침내 전 세계 숫자라고 합리화한다. 그들은 촛불숫자가 선악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시위가 시작된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의인’ 김대업이 양심선언하며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키웠다. 같은 해 6월에 있었던 ‘효순‧미선’ 사건에 대한 억지의혹과 연계하여 엄청난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었다. 지금 이 사건의 실체는 ‘김대업 사기극’으로 명확히 밝혀졌다. 당시 좌파세력이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한 정치공작이었다. 노무현 스스로 “재미 좀 봤다”고 했을 정도다.

2004년 노무현 탄핵 때도 촛불이 등장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아니란 말인가. 노무현 가족의 비리는 문제 삼아선 안 되고 박근혜 측근의 비리는 파헤쳐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보면 촛불이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됐음을 알 수 있다. 좌파정부 10년의 적폐에 신물이 난 민심이 이명박을 500만표 차이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취임 3개월 만에 광우병촛불에 놀라 반신불수가 됐다. 2008년 봄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생기고 사지를 비틀며 죽어간다고 괴담을 퍼뜨려 학생들은 물론 유모차까지 촛불시위에 끌어들였다.

‘아니면 말고’ 방식은 한국정치의 수단이 됐다. 미군의 천안함 폭침설, 밀양 송전탑 유해설,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환경파괴, 도롱뇽 죽이는 천성산 터널, 연평도포격 유도설, 세월호 침몰 괴담, 문창극 총리후보 인사청문회 보이콧, 이승만 망명조작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의혹을 제기해놓고 시민단체란 탈을 쓴 좌파들이 득달같이 촛불집회를 연다. 여기에 조직을 가진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자금‧인원이 투입된다. 문화계인사나 연예인이 합류하면 언론이 따라가고 정치인이 슬쩍 끼어드는 패턴이 반복된다. 대북 강경책과 통진당 해체에 분기탱천한 좌파가 최순실 문제라는 호재를 놓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이 승선한 김정은호는 빙산의 1/10만 보았을 뿐 잠겨있는 9/10에 부딪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그 조용한 빙산이 태극기와 함께 결집하고 있다.

노대홍 천지인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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