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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2)]선비 풍모 지닌 신경민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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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2)]선비 풍모 지닌 신경민 국회의원

[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2)]-신경민 국회의원


'예향' 전주 출신…어려서부터 예술 가까이 접해

애정 쏟았던 간송미술관 위기 안타까워
문화계·정부·민간 함께 '살리기' 나서야


▲ 서양화가 한오 씨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
[글로벌이코노믹=김민희 예술기획가]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 또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한 뉴스 앵커의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를 기억하는가.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깨워주기 위해 ‘진정성’ 있는 바른 말을 할 줄 알았던 언론인. 그 분을 만나러 붉게 물든 단풍과 낙엽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여의도 길을 따라 의원회관으로 갔다. 글로벌이코노믹에 ‘음양으로 보는 미술사’를 연재하는 서양화가 한오 선생(1957~, 이하 한오)의 후원자이기도 한 신경민 의원(1953~, 이하 신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소신있는 발언으로 유명한 앵커 출신 신 의원은 올해 1월부터 민주통합당 대변인을 맡고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후원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설렌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까칠하고 경직된 느낌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신 의원은 부드러운 미소로 필자를 반겨줬다. 역시 앵커 출신답게 분명하고도 멋진 목소리를 가졌다.

▲ 한오 作 'Flower'
한오는 “작가에게는 그림을 사거나 돈을 대주는 후원자가 있고 사회성이 모자라는 작가들에게 멘토의 역할로 후원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신 의원은 후자입니다.”라며 신 의원을 소개했다.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함께 하며 꾸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하는데, 신 의원은 그 동안 한오에게 박식한 문화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언론인으로서 작가가 언론에 접근하는 방법, 말하는 스킬을 알려주었고 필요한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었다. 신뢰가 바탕이 된 두 사람의 오랜 관계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한 번 들어가 보자.

한오는 화가이지만 또한 독학으로 동양의학을 공부한 대체의학 전문가다. 1990년대 촉망 받는 작가로 떠올랐지만 미술계의 폐단과 모순을 등지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홀연히 미술계를 떠났다. 나홀로 외길을 걸으며 원하는 작업을 해 온 그가 신 의원과 친구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인정이 되었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오와 신 의원의 첫 만남은 의외로 미술이 아니라 신 의원의 아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아들이 아토피와 비염으로 고생하고 성격이 변할 정도로 힘들어 하자 여러 병원과 한의원을 다녀보아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한오와 건강상담을 위해 찾아가게 되었다. 그 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신 의원은 한오가 그림 그리는 작가인줄 몰랐는데 신 의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스승인 한국의 전설적 미술기자 이규일 선생(1939~2007, 이하 이규일)이 한오를 굉장히 훌륭한 작가라고 평가하여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오의 그림 취향이 변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힘이 넘치고 밝은 지금의 작품도 좋아하지만 야수적이며 다소 어두운 편인 예전 그림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아마도 예전 그림을 그릴 당시 한오가 지녔던 비판적 태도와 몸부림의 표현을 더욱더 공감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한오는 말했다. “신 의원은 정직한 사람이에요. 가장 선비에 근접하지요. 그 정직한 시선으로 내 그림을 봐 주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오른쪽)과 서양화가 한오
선비라 칭함 받는 신 의원의 고향은 전주다. “전주는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문화적 향취가 있는 지역입니다. 전주에 있는 어느 다방에 가도 벽에 붓글씨나 그림이 있습니다. 심지어 분위기가 엉망인 곳을 가더라도 말입니다.” 지역의 문화적 분위기 외에도 신 의원의 집안사람들과 가까운 친구들 중에 그림을 그리거나 붓글씨를 쓰는 분들이 있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예술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신 의원의 부친도 기자였는데 주변에서 이런 저런 작품들을 구해왔다. 지금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지만 만약 있었다면 값나가는 작품들도 꽤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일부 작품을 소장하고 계시는데 그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신 의원의 집에 걸려있는, 신석정 시인(1907~1974)이 시를 쓰고 지역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붓글씨 중에 석정체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다가 무엇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글씨에 담겨있는 힘이 좋았다고 신 의원은 말한다. 기자인 부친의 영향과 일제시대 때 저항정신이 담긴 시를 쓰기도 한 신석정 시인의 작품을 늘 가까이 했으니 신 의원이 지닌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어디에서 왔을지 짐작이 간다. 한오와 신 의원의 만남은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진실한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가와 후원자의 만남이었다.

한류의 흐름이 강세가 되면서 한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끈 엘리트 정신인 ‘선비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 용기를 지닌 자’를 말한다. 말 뿐만이 아닌 행동과 실천이 따르는 사람에게 부여된 존경이 담긴 명칭이다. 신 의원은 언론인으로서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자신이 가진 원칙과 중심을 지키고 용기 있게 행동해온 사람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이제 국회의원으로 그가 가는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 좁은 길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지친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될 것이다.

▲ 한오 作 '투우'
신 의원과 가까웠고 존경하는 스승인 이규일은 미술계 인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한오와도 친분이 있는 이규일은 신 의원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70년대에 중앙일보에 입사해 한국 최초의 미술전문기자가 되었다. 신 의원이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신 의원이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온 후 기자와 앵커로 활동할 동안 계속해서 돈독하게 지냈다. 돌아가실 때까지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이규일은 특히 컬렉션광으로 유명했다. 큰 방 하나를 컬렉션으로 가득 채워놓았는데 한국 미술사를 수놓은 많은 작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전문 이삿짐 센터를 불러야 해 사모님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존경 받는 미술기자라는 권세를 이용해서 작가들에게 그냥 작품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이규일은 절대 그런 법 없이 매번 작품의 값을 쳐서 주었다. 무엇보다 작가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어른이셨다. 신 의원은 운이 좋게도 젊은 시절부터 이규일 컬렉션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고, 이규일이 출판한 미술관련 책들도 모두 읽었다. 그로인해 현대미술 특히 한국 미술에 대한 상식을 쌓을 수 있었다. 신 의원과 한오는 입을 모아 이규일 선생은 참 용감하고 독특하신 분이라 말했다. “이규일 이후에는 미술 전문기자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미술계의 흐름과 같이하면서 내부의 비리 등도 거침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어요.”라며 아쉬워했다.

신 의원은 철저히 사회과학을 한 사람이다. 대학전공도 사회학이었고, 대학에 들어가서 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일반과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생겨 공부한 결과 기자가 되었다. 기자생활도 법률과 외교통일·국제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 미술에서 국제정치를 해석해 냈던 동주 이용희 교수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현재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으로 문화 전반의 문제점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꼭 집어 지적을 하고 있는 듯하다.

▲ 한오 作 '무제'
신 의원이 한오의 그림을 소장 한 것은 현재 의원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 처음이다. 의원회관에 입성하면서 비어있는 흰 벽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다가 한오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작품 몇 점을 구입했다. 한오의 예전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최근 작품인 꽃 그림을 선택한 것을 보면 밝고 희망찬 세상을 꿈꾸는 그의 염원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제야 작품을 컬렉팅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동안은 그림을 소장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림을 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작품은 인연 때문에 소액을 주고 사기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가진 서화나 서예를 보면서 느낀 점은 그림은 보관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림이나 글씨에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중 신 의원이 얼마 전 지적했던 ‘간송미술관 문화재 훼손’ 기사가 떠올라 언급했더니 신 의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미술계 안의 몇 가지 답답한 문제점에 대해 말해주었다.

신 의원에게 간송미술관은 매우 특별한 곳이다. 1971년 봄·가을 전시회를 처음 열었을 당시 대학에 들어가서 전시 기사를 우연히 접하고는 물어물어 미술관을 찾아갔다. 문화재 급 유물이 가득한 미술관을 둘러보며 너무 좋아 전시관련 책도 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갔다. 신 의원의 애정이 가득한 간송미술관이 지금 위기에 처했다.

1938년에 설립되어 국보급 유물 5000점을 보유한 국내 최고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6·25때 흩어진 유물을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재구입, 소장하고 있다. 간송의 한국문화와 예술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재를 통해 우리 문화와 민족정신을 지키려 했던 간송의 정신과 그가 남긴 유산이 잘못된 보관상태로 인해 파괴되고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 한오 作 'Represent'
신 의원 외에도 미술사학자인 고 진홍섭 선생이 10년 전에 가보고 다 썩었다고 얘기했을 만큼 보존상태는 심각하다. 좁은 전시관에 들어가보면 진열관 내부에 벌레와 나비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간송의 훌륭한 컬렉션의 훼손이 이대로 계속되다보면 한국 미술사가 위기 국면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감상하고 컬렉션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고 보관·보존을 잘해야 하는데 실질적 운영자인 최완수 실장의 작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오히려 문제라고 했다. 개인 컬렉션이라는 명목으로 수장고뿐만 아니라 컬렉션 리스트가 담긴 도록도 공개를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손안에 움켜지고 있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간송 선생이 하늘에서 가슴을 치고 있을 것 같다.

간송미술관의 또 다른 문제는 문화재 연구자들을 위해서 내부의 모든 자료를 개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술연구소가 있지만 그것이 공공을 위해서 쓰여져야 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교육하고 인식을 넓혀서 사랑을 퍼져나가게 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회화가 중국과 일본과 다르다는 것을 세계에 전파해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하기에 바쁘다.

필자가 소개한 미국의 예술 후원자인 컬렉터들은 역사가 짧은 조국을 위해 부를 이용해 여러 예술품들을 후대에 남겨줄 목적으로 컬렉팅하고, 나아가 그 컬렉션을 사회와 지역발전을 위해 기증하고, 모든 자료를 아카이빙해 사람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부끄럽지만 너무나 비교가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언론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 크게 기사화 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해주는 이야기라 여겨졌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등 수천 분야일 것인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국회에서 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정부가 나서야 하고 대통령부터 나서야 합니다. 또한 민간도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왼쪽)과 서양화가 한오
신 의원이 지적한 것 중에 ‘반구대 암각화’도 있다. 1972년에 울산 강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한반도 미술의 첫 작품이자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자랑스러운 유물인데 근처에 울산공단을 위한 공업용수용 댐을 짓게 되면서 암각화가 침수가 되어 이대로 가다간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 발견된 지 40년 동안 아무 진전이 없다. 우리나라의 특별하고 소중한 유산을 유네스코에도 등록해야 하는데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말만하고 현실적으로는 실행이 안 되고 있다. 물에 관한 논란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함께 달려들어야 한다.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간송미술관이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신 의원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또한 미술은 재능만 가지고 안 되는 구조입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이념, 영향력에 얽혀 가는데 한오의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다. 본인의 재능만 가지고는 미술계를 파헤쳐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지요. 정치, 경제, 사회도 그렇지만 예술쪽에도 이런 일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오가 그런 것들을 타파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샘플들이 각 분야에서 나와줘야 우리나라가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나비처럼 훌륭한 예술가도 처절한 비평과 고난의 시간들을 이겨내며 탄생하기 마련인데 우리의 문화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신 의원이나 한오와 같이 깨어있는 선배들의 소금 같은 역할이 이 사회를 빛나게 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 하나부터 움직여야 할 때다.

/김민희 예술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