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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이면서도 가장 일본적 배경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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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이면서도 가장 일본적 배경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김용만의 문학기행(12)-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설국'

집필현장 복원한 기념관 국제적 유명세 ‘톡톡’


백설 뒤덮인 온천장 일대 자연과 풍물 아름답게 그려


작품 온전히 이해하려면 현지 정서에 몰입돼야 가능


인생 허무에서 나오는 非情美가 마음의 평화 이끌어

▲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방이 있는 유자와의 다카항 호텔
신감각파(新感覺派) 문학운동의 태두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도 허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야스나리는 세계를 보는 눈이 비정하고 냉혹했다. 두세 살 때부터 부모와 육친들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죽음의식과 애정욕구가 남다를 테고, 그 두 가지 시추에이션인 허무와 탐미는 병약한 그를 예민하면서도 관조적인 묵언(?言)의 체질로 성장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체질은 일상적이며 상식적인 삶을 거부했을 텐데, 그때마다 그의 묵언은 사람과 사회에 쏟아내고 싶은 말을 삼켜버렸을 것이다.

답답하거나, 서글프거나, 어이없거나, 모순되거나, 실망스럽거나, 눈꼴사나울 때는 한바탕 떠들어야 숨이 트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 허튼소리를 대신할 묘책이 필요하다. 가와바타의 경우에는 그 묘책이 잠이었을 것이다. 떠들 것이냐 침묵할 것이냐, 그 두 가지 갈등 중에서 그는 후자를 택했다. 요컨대 그의 잠은 현실도피적인, 즉 몽환적인 삶을 추구하는 체질이 일상에 반역하는 한 형태로서, 자기 파괴적 고통미학에 함몰되려는 일본 특유의 탐미적 욕구분출의 소극적 형태라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그의 자살은 적극적인 형태로 볼 수 있겠는데, 사실 필자가 가와바타를 다루고 싶었던 것도 그의 파격적인 삶의 양태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허무와 그 허무에서 싹트는 비정미(非情美)는 내게 마음의 평온과 나른한 신앙적 구원(救援)마저 느껴지게 한다. 다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이다.

“작품 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



2007년 12월 2일 오후,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2시간의 비행 끝에 니가타 공항에 착륙, 마중 나온 버스를 타고 곧장 유자와 온천으로 향했다. 어둠이 깔린 지 오래지만 설국을 찾아간다는 기대에 달뜬 내 감각이 그 어둠을 순결한 몽환의 세계를 감싼 껍질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숙소인 유자와의 다카항(高半)호텔은 그 두꺼운 어둠 저편에 잠겨있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시설이 모텔 수준에 불과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방이 있어 국제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설국』의 집필 현장을 복원해 놓은 기념관부터 둘러보았다. 3층에 만들어진 기념관 입구에는 <高半旅館> 간판이 세워져 있고, 꽤 너른 전시관에는 붓글씨, 그림, 사진, 책, 필기구, 집기, 인물 모형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튿날에는 아침부터 온종일 설국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먼저 호텔 인근에 있는 <雪國館>에 들렀는데 그곳은 역사민속자료관을 겸한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설국관 간판이 양 벽면에 붙어 있고, 안에는 설국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화가들이 『설국』에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들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그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자료관에는 또 고마코의 모델이 된 마쓰에이의 거처를 재현한 ‘고마코의 문’이 있고, 그녀의 스키 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스키 타는 여성이 드물었던 당시의 ‘현대여성’ 상을 엿볼 수 있었다.

설국관을 나와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이 새겨진 석비를 찾아 주물공원으로 향했다. 타원형의 반반한 자연석에 설국의 첫 문장이 가와바타의 서체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 첫 문장은 일본 근대문학에서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어에 國境, 長, 雪國, 夜, 底, 白 등의 한자가 끼어 있어 번역의 밀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석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작품에서 신사(神社)로 묘사된 스와사(寺)를 찾아갔다. 정원에 서 있는 이끼 낀 돌사자 상 옆에는 평평한 바윗돌이 놓여 있는데, 주인공 시마무라가 그 돌에 걸터앉은 고마코와 대화를 하면서 사랑에 빠져들었던 장소다.

오후 느지막이 호텔로 돌아와 3층 영사실에서 단체로 영화 『설국』을 감상하고, 일행은 그냥 자리에 앉은 채 준비해온 캔맥주를 마시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문협측이 정식으로 필자한테 내일 밤 도쿄 뉴오타니호텔 세미나장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호텔은 초특급호텔로 특히 정원이 유명했다. 필자는 준비해온 게 없어 난감했지만 강연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제 기내에서 『설국』을 읽던 중 관심을 끌던 한 문장이 떠올랐던 것이다.



‘직접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양무용을 좋아한 주인공 시마무라에 대해 서술한 소설 지문(地文)인데, 이 서술은 20세기 초의 러시아 형식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이미 일본에서는 익숙한 문예사조가 되었을 테고, 가와바타 정도라면 당연히 그 사조를 숙지했으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었다.

▲ '설국'에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형상화 해놓은 역사민속자료관
동경제국대학(국문과) 시절부터 신진작가들의 동인지인 <문예시대>의 창간에 앞장선 작가인데, <문예시대>의 창간은 신감각파(新感覺派)의 탄생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객관적 사물(자연)을 주관적으로 육화한, 즉 일상생활을 부정하여 새로운 생활감정의 표현을 모색한 신감각파의 경향은 전후 유럽에서 풍미한 표현주의, 미래파, 다다이즘 같은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았으니, 비슷한 시기에 유입되었을 러시아 형식주의에 무관심할 리 없다. 더구나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처음 제시된 ‘낯설게하기’는 가와바타의 문체형성에 적절한 도구로 작용했을 게 틀림없다.

대상의 현실적인 묘사와 재현에 그쳤던 종래의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대상을 예리한 분석과 지성으로 새롭게 구성하여 감각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가와바타로서는, 그의 신감각파 운동과 상동관계에 놓인 ‘낯설게 하기’는 구세주와도 같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홀스토메로』와 같은 작품 묘사에서 영향을 받은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을 생활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대상들을 제대로 느끼기 위하여, 정말 돌이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기나 물이나 햇볕 같은 우리 주변에 편재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동화(自動化) 되어 있기에 망각되므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 최초의 지각(知覺)을 생생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6월 11일 오사카(大阪)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배내털을 벗기도 전에 죽음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출생 이듬해에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죽고, 그 이듬해에는 어머니 역시 폐결핵으로 죽고, 4년 뒤에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죽고, 또 3년 뒤에는 누나 요시코가 죽고, 또 5년 뒤에는 그동안 단둘이 살아온 조부마저 사망하자 가와바타는 고아가 되어 외숙부 집에 기거하게 된다.


동경 제1고등학교를 나온 가와바타는 1920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한다. 1924년에는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 등과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으며, 사춘기의 청순한 연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이즈(伊豆)의 무희(舞姬)』등으로 이름을 낸다. 제1고(지금의 전문대)시절인 20세 때 이즈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길동무가 된 14세의 청순한 무희에게 쏠린 연정과 감상을 감각적인 수법에 의해서 순일하고 아름다운 서정시의 경지로 승화시킨 단편소설이다.


가와바타의 대표작인 중편 『설국』은 작가가 36세이던 1935년부터 1947년까지 12년 동안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꾸준히 다듬은 작품으로 진작부터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 가와바타의 『이즈의 무희』와 『설국』은 타인이 자기에 준 애정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술회했는데,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자신을 고아로 여기고 그 고아근성에 젖어왔던 것이다.


『설국』을 읽는 독자들은 작품의 주제를 캐려고 애쓰겠지만 잘 인식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주제가 막연하다는 점과 이야기의 줄거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고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물들의 섬세하고 미묘한 심리변화의 순간적인 단면만을 묘사하고 있다. 인물들 사이에는 현실적인 아무런 관계도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데, 이 소설은 어떤 사건이나 관계를 그리고자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의 인물과 배경은 있지만 소설의 형식이랄 수 있는 구성(Plot)이 없다.


유자와 온천을 무대로 삼은 『설국』은 백설에 뒤덮여 있는 온천장과 그 일대에 펼쳐진 자연, 그리고 지방 풍물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그러한 배경은 동양적이면서도 가장 일본적인 데에 특색이 있다. 그러니 일본 서정의 화신과도 같은 『설국』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일본적인 정서에 몰입되어야 가능하다. 『설국』이 단독성(單獨性)을 인정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세 사람이 나온다. 서양무용에 취미가 있고 부모가 남겨준 재산으로 일없이 살아가는 시마무라, 설국의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게이야 고마코, 아름답고 청순한 소녀 요오코가 전부다. 고마코에게 마음이 끌린 시마무라가 1년 만에 그녀를 만나러 설국을 찾아가는 장면이 도입부로 설정된 이 소설에서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요오코를 사실대로 비춰주는 일종의 공허한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