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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13)]女작품만 컬렉팅하는 발레리아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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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13)]女작품만 컬렉팅하는 발레리아 나폴레옹

[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3)]-발레리아 나폴레옹

벽·바닥, 천장 샹들리에까지 집 전체가 예술 작품


여성 예술가 작품만 컬렉팅
절대 되팔지 않는 이색 후원자




'세련된' 작품 고르기 보다
자신만의 주제·취향 따라 선택




▲ 발레이아 나폴레옹 가족 Courtesy of The London Magazine
[글로벌이코노믹=김민희 예술기획가] 올해 올림픽으로 전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런던은 현대 미술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화려한 역사 속에 묻혀있던 낡은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본고장으로 바꾸려는 많은 움직임이 질적 변화를 이끈 결과다. 영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현대작가를 키우고 후원하는 터너 프라이즈를 운영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와 데미안 허스트가 속한 YBA(Young British Artists)를 후원한 찰스 사치(사치 갤러리)가 대표적이다.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소개하고 있는 ‘코리안 아이’도 2009년, 2010년에 이어 올해 런던 올림픽 시즌에 맞춰 사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한국의 미술을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는 런던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왠지 모를 친밀함을 가져다 준다.

런던의 많은 예술 후원자중 여성 미술가의 작품만 컬렉팅하는 독특한 예술 후원자가 있다. 바로 발레리아 나폴레옹(Valeria Napoleone·이하 발레리아)이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프라다 웨지힐과 반 양말을 신고, 미우미우와 이세미야끼의 치마와 탑을 입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유쾌하고 친절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누구와도 금방 친해진다. 예술 사랑과 요리로 유명한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예술품들을 그녀만의 색깔로 충분히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녀의 집은 미술가의 작품들과 함께 구석구석 개념적으로 꾸며져 있다. 하나의 생활 뮤지엄이다. 모든 벽과 바닥, 천장의 샹들리에도 예술작품이다. 심지어 빨래통까지….

거실에 들어가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이기도 했던 현대설치미술가 양혜규(1971~)의 ‘쌍둥이의 업앤 다운’ 작품이 있다. 그녀 자신이 쌍둥이기 때문에 그 단어로 미술가에게 커미션을 준 작업이었다. 스위스 아티스트 마이 투 퍼렛(Mai Thu Perret·1976~)에게 사막 풍경의 조각품을 주문해 만든 작품은 뾰족한 부분이 많아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잘 받아왔다. 아이들 각자의 방은 찰흙이나 바비 인형 등으로 자신의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듬뿍 담도록 했다. 그녀는 작품들을 삶의 공간에 스며들게 해 자연스럽게 예술과 함께 살면서 그녀의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하며 예술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 니콜 엘슨맨_브루클린 맥주정원 2 (Brooklyn Biergarten II)_2008
발레리아는 부유한 이탈리아 기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뉴욕에서 공부하던 중에 만나 금세 사랑에 빠지게 된 이탈리아 금융인과 결혼해서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자상한 엄마이고 가족 중심의 발레리아에게 여성 미술가의 작품만 컬렉팅하게 된 것은 계산된 계획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찾아온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1990년대 말 뉴욕대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는데 지겹고 따분한 시간들을 보내며 지쳐있을 때, 쥬얼리 디자이너인 동생이 예술경영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르네상스 앤티크와 데코로 가득했던 집에서 자란 그녀에게 뉴욕패션스쿨(FIT)에서의 예술경영 전공은 동시대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환경 안에서 예술을 가까이 접하며 미국미술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예술을 보는 그녀의 시각은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

14년 전 학생시절이었을 때, 우연히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한 갤러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발레리아의 첫 컬렉팅이 시작됐다. 첫 작품은 캐롤 새드필드(Carol Shadfield)의 흑백사진이었다. 비누거품의 추상적 이미지의 작품이었는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여성의 몸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그 작품을 본 순간 밖의 세상으로 뚫고 나가지 못하는 갑갑한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어 바로 구매하게 되었다.

당시는 여성 미술가들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때였다. 발레리아는 그들만의 예술적 표현 언어의 힘과 재능에 매료되었다. 첫 컬렉팅 이후 우연히 여성 미술가의 작품을 더 구매하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이라는 주제로 컬렉션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고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페인팅, 사진,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있는데, 구입하고 싶은 여성 미술가의 작품들의 리스트가 아직도 매우 길다고 한다. 그녀의 컬렉팅 주제는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매우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주목 받는 컬렉터가 되었다. 발레리아는 런던의 중요한 컬렉터들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만난 각각의 아티스트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컬렉팅의 과정은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 안드레 버트너_그리스도의 탄생_2007
소장하고 있는 작품 몇 점은 강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그녀는 페미니스트를 후원하거나 미술시장에서 그녀의 그림을 가지고 정치적 게임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발레리아는 작품보다도 미술가들을 컬렉팅하고 후원한다.

“예술은 사람들을 함께 모아 소통하는 것이지요.” 발레리아에게는 미술가와의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카이로 출신 미술가, 가다 아머(Ghada Amer·1963)와 매우 친한 친구 사이가 되면서 배우게 된 점이기도 하다. 작품을 사기 위해서 그녀는 몇 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기도 한다. 괜찮은 작품을 보았는데 만약에 미술가를 모른다면 우선 관심을 두고 먼저 자세히 탐구한다. 그리고는 미술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다.

아트 페어에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번잡한 분위기를 피해 차분히 아티스트와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때를 찾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가 좋아하는 영국 갤러리들, 런던 남부에 위치한 그린그라시(Greengrassi)와 동부의 홀리부쉬 가든(Hollybush Gardens)은 그녀에게 페어가 시작하는 이른 아침에 와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특별 초대카드를 보내 준다.

발레리아는 2003년부터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적 미술시장인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를 매우 좋아한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고, 그 많은 갤러리들을 둘러보러 전 세계로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페어를 통해 기존 그녀가 후원하고 알고 있는 미술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을 수도 있고 젊고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발굴할 기회가 된다. 잠재되어 있고 가치 있는 대작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열정이 지금의 발레리아를 훌륭한 컬렉터로 만들어 준 것이다.

▲ 폴케 피사노_연설의 형태(figure 2), 2009
발레리아는 ‘세련된 아트’를 컬렉팅하지 않는다. 영국을 대표하는 그룹 YBA(Young British Artist)의 작품을 봤을 때는 어떠한 전율이나 감흥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갓 졸업한 미대생과 옥션 하우스로부터 그림을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전통적 컬렉터’라고 말하는데 자신만의 주제와 취향을 가지고 신중하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에게 직접 구매하거나 그녀의 딜러에게서 자문을 얻어 구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3만 파운드를 넘지 않는 가격으로 거의 모든 작품들을 구매했지만 현재 엄청난 가격으로 가격이 상승한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발레리아는 절대 되팔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도록 공유하고 있다.

그녀는 200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뮤지엄 수준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컬렉션은 그녀의 아파트에 모두 자리잡고 있지만 때때로 비영리 문화예술기관에 대여해 주고 전시를 열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발레리아가 런던에서 유명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규칙적으로 서펜타인 갤러리나 캔덴 아트센터, 또는 그린그라시 등에서 열리는 전시를 위해 디너파티을 준비해 호스팅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뛰어난 감각으로 사람들을 초청해 그녀만의 요리를 대접한다. 많은 스태프들이 있지만 이탈리안 전통에 따라 모든 요리는 그녀 스스로 만든다. 발레리아는 최근에 요리책을 출판하기도 할 만큼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데 집에 80명의 사람들을 초대해도 직접 요리를 담당한다. 미술과 요리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녀는 행복을 주는 사람이다.

▲ 모니카 베어_무제 2009
최고의 컬렉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컬렉션만 구축하는데 멈춰서는 안 된다. 예술을 후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사회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 발레리아도 그 길을 걷고 있다. 2006년, 니콜 웨머(Nicole Wermer)의 거대한 ‘진주 귀걸이를 한 엄마’ 작품을 캠덴 아트 센터의 외부에 설치하도록 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했고, 다리아 마틴(Daria Martin)과 루실 디새모리(Lucile Desamory)가 자신의 작업들을 상영할 수 있도록 필름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또한 여성 아티스트들을 위한 막스마라 아트 프라이즈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스튜디오 볼테르(Studio Voltaire)와 람베쓰의 비영리 아트센터에 비즈니스 개발에 책임을 맡고 있다.

발레리아는 이제는 우리 시대에 미술계 안에서 변화를 약속하고 새로운 옷을 입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세계에서 열악한 환경에 처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여성 미술가의 후원자가 되어서 그들이 더욱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고 특별하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듯 미술계 안에서도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주는 손길이 매우 필요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주변에 젊은 미술가를 찾아 격려의 말이라도 전해주며 작은 손길로 후원해 주는 것은 어떨지.


/김민희 예술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