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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노력·창조성으로 최고 컬렉션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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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노력·창조성으로 최고 컬렉션 완성하다

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5)-허버트&도로시 보겔 부부(하)

애정으로 미약하게 시작 40년 후에는 세계적 컬렉터로

소파·가구에 옷장까지도 미술 작품 위해 포기
미니멀리즘·개념미술의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보겔부부와미술가친구들이미지 확대보기
▲보겔부부와미술가친구들


[글로벌이코노믹=김민희 예술기획가] 지난 회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에 헌신한 가난한 컬렉터 허버트 & 도로시 보겔 부부(이하 보겔 부부)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미술계의 이방인이었지만 결국 유명한 스타 컬렉터가 된 보겔 부부 이야기.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삶이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디렉터인 카터 브라운은 보겔 부부의 컬렉션이 예술 그 자체라고 평가했는데, 컬렉션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악착스런 노력, 그리고 창조성으로 정성스럽게 구성되어 졌기 때문일 것이다. 메디치나 록펠러만 세계적 미술 컬렉터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며 미술 컬렉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제 그들의 특별한 삶 속으로 좀 더 가까이 들어가보자.

▲보겔부부이미지 확대보기
▲보겔부부


1962년 1월 도로시는 열셋 살 연상의 허버트와 결혼했다. 포코노에 있는 리조트에서 처음 만났는데 허버트가 지적인 도로시에게 반해 데이트를 신청하면서 둘은 사랑에 빠졌다. 도로시의 고향인 뉴욕 엘미라에 있는 작은 시나고그(Synagogue, 유대인 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도로시가 미술보다 클래식 음악과 연극을 좋아했던 것과는 달리 허버트는 결혼할 당시 이미 페인팅과 드로잉에 심취해 있었다.

도로시는 “예술은 허버트의 하나뿐인 관심사였어요. 동물들을 제외하구요”라고 말했다. 허버트는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 두 열정을 신부와 나누고자 했다. 그들의 작은 집에서 미술품과 마네, 르누아르, 그리고 코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 열대어, 그리고 스무 마리의 거북이와 함께하는 삶이 시작됐다.
결혼 전, 허버트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고전 회화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점차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미술가들의 아지트였던 그린위치 빌리지의 세다 태번(Cedar Tavern)에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프랜즈 클라인(Franz Kline),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는 미술가들의 대화에 참여했으나 주로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허버트는 미술가들을 존중했고 미술가들도 우체국 직원인 그를 존중해 주었다. 또한 매사추세츠의 프로빈스 타운에 있는 미술가 집단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날 정도로 미술에 대한 허버트의 마음은 열정 그 자체였다.

1950년대 중반 우체국에서 일을 하며 허버트는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 수업을 들었다. 운이 좋게도 그는 매우 뛰어난 교수님들을 만났다. 바로 독일인 미술학자 맥스 프라이드랜더(Max Friedlander·1867~1958), 로버트 골드워터(Robert Goldwater·1907~1973), 그리고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였다. 이 수업을 들으며 허버트는 미술의 역사와 기본 지식을 제대로 쌓을 수가 있었고, 도로시와 함께 워싱턴 DC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함께 미술 세계로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되었다.

보겔 부부는 결혼 후, 미술사 수업과 페인팅 수업을 들었다. 뉴욕 유니온 스퀘어에 있는 작업실 공간을 임대해서 창작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함께 뉴욕 갤러리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전시 오프닝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새로운 미술가와 작품을 찾기 위해 예리한 눈으로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하기를 삼 년, 보겔 부부는 자신들이 작업할 때보다 다른 미술가의 작품을 보는 것이 더 기쁘고 장기간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65년에 작업실을 닫고 컬렉팅에 집중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적게 버는 돈으로 내리기에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40년 후에는 5000점의 작품을 소장한 세계적 컬렉터가 된 것이다. 렌트 컨트롤 되는 원베드 아파트에서 평생 살며 구입하는 모든 작품을 집으로 가져와야 했지만 그들 공간의 전부를 심지어 옷장까지도 모두 미술 작품을 위해 내어 놓았으니 가능했다. 소파와 가구도 버렸고, 부엌부터 화장실까지 미술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집념이 대단한 부부이다.

▲보겔부부와내셔널갤러리큐레이터
▲보겔부부와내셔널갤러리큐레이터


보겔 부부에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술이었다. 컬렉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컬렉팅의 방향이 정해졌다. 바로 미니멀리즘. 당시 미국 화단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추상표현주의가 초자아를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호소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팝 아트가 문명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으로 인기를 끌었었는데, 뒤를 이어 엄격하고 비개성적이면서 소극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미니멀리즘이 탄생하였다. 보겔 부부는 이 새로운 사조에 매력을 느꼈다. 그들의 검소한 삶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어서 였을까. 또한 반 미술적인 제작 형태로 작품 그 자체보다도 제작 의도나 과정이 예술이라고 여기며 미술가들의 이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개념 미술을 사랑하였다.

보겔의 컬렉션은 그들이 맺었던 미술가들과의 우정으로 가치가 더욱 빛났다. 특히 젊고 무명이었던 미술가들을 친구로 삼았다. 그 중 미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댄 그라함(Dan Graham·1942~, 이하 그라함)과 미국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거장이 된 솔 루잇(Sol LeWitt·1928~2007, 이하 루잇)과 아주 가까웠다. 1965년 약 1년간 그라함은 다니엘스 갤러리에서 매니저로 있었는데 보겔 부부는 자주 갤러리에 들러 미술 작품을 보고 그라함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새로운 예술 형태의 존재, 예를 들어 미니멀리즘 미술가 도널드 주드(Donald Judd) 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루잇의 작품을 매우 좋아해서 첫 개인전이 끝나고 작품 한 점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라함이 도와주었는데 갤러리가 문을 닫은 후에도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자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라함은 보겔 부부에게 미술가와 직접 계약을 해서 작품을 받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후에 그들의 컬렉팅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65년 8월 루잇의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보겔 부부의 본격적 컬렉팅이 시작되었다. 루잇이 자신의 조각 작품을 배달해주기 위해 자동차를 소유한 미니멀리즘 미술가 친구인 로버트 망골드(Robert Mangold·1937~)와 같이 갔는데 그때부터 보겔 부부의 미술가 친구 집단이 더욱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보겔 부부와 루잇의 우정은 매우 깊었다. 루잇이 죽기 전 1년간은 허버트와 매일 토요일 아침에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허버트는 다른 미술가들과도 전화통화를 자주하였다. 보겔 부부는 미술가들과의 통화가 그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미학적 만족과 지식의 경계를 확장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며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미술가들은 보겔 부부의 켈렉팅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 컬렉션에 작품이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다. 워낙 미술가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보겔 컬렉션에 있는 많은 작품들이 보겔 부부의 생일이나 기념일 때 선물로 받은 것이기도 했다.

보겔 부부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럽과 미국 미술가들에게 중점을 두었다. 미술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 그들의 컬렉팅 경험에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누구의 인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품이 마음에 들면 미술가에 작업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미술가가 자신의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소개해도 부부의 취향과는 다를 수 있었다. 하물며 허버트와 도로시도 때때론 다른 의견을 갖기도 했다. 허버트는 화려한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고, 도로시는 미니멀한 작품을 선호했다.

1975년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보겔 컬렉션의 첫 전시가 맨하탄에 있는 클락타워 갤러리(Clocktower Gallery)에서 열렸다. 같은 해 말에 필라델피아 동시대 미술 학교(Philadelphia’s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ICA)에서 보겔 컬렉션의 60년대와 70년대 페인팅, 드로잉, 조각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이어서 미시간 미술관의 디렉터인 브렛 왈러(Bret Waller)가 보겔 컬렉션의 더욱 다양한 미술가 그룹의 작품을 선택해서 전시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 연구를 위해 보겔 컬렉션 전시를 찾아왔다.

▲존솔트의보겔부부침실드로잉
▲존솔트의보겔부부침실드로잉


전시는 계속되었다. 1982년 뉴욕 팟스담 주립대의 브래너드 갤러리에서 기획한 ‘보겔 컬렉션 20주년 기념 전시’, 알칸사스 대학, 도로시의 고향인 엘미라부터의 순회전시 등 많은 전시들이 뉴욕, 피플 잡지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보도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알려졌다. 보겔 부부는 동시대 미술 수집에 관한 강의나 패널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시를 위해 떠났던 작품들이 돌아오자 보겔 부부는 놓을 자리가 없어 포장 박스 채 집에 보관해두게 되었고, 그들의 집은 더 이상 미술 갤러리가 아니라 미술 보관소였다. 부부는 심각하게 그들의 보물을 영원히 보호해줄 수 있는 장소를 생각하게 되었다.

몇 해 동안 다양한 미술기관에서 그들의 컬렉션에 관심을 보여왔으나 보겔 부부의 마음에 적합한 곳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내셔날 갤러리의 20세기 미술 큐레이터 잭 코와트(Jack Cowart)를 만나서 내셔날 갤러리가 동시대 미술 전시공간을 확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큐레이터는 열정적으로 보겔 부부에게 갤러리와 함께 협력할 것을 권했고 보겔 컬렉션의 카탈로그 작성을 대행해 주게 되었다. 카탈로깅 과정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보겔 컬렉션을 뮤지엄 소장품으로 받아들일 의사를 전했다. 무료 입장과 기증된 작품을 되팔지 않는다는 갤러리 규칙이 보겔 부부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내셔널 갤러리는 보겔 부부가 미술품을 컬렉팅 하기로 다짐한 첫 장소이기도 했다.

컬렉션 전부를 기증하게 되며 미국 50개의 주에 작품 50점씩 보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보겔 부부와 내셔널 갤러리 큐레이터가 7년 동안 함께 연구하며 신중하게 작품들이 보내질 뮤지엄을 선택했다. ‘50x50’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보겔 부부가 크레스 컬렉션이 전국에 옛 거장의 패인팅 작품들을 전국에 기증했던 사례에서 영향을 받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선한 영향력의 순환이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보겔 부부가 그들의 컬렉션을 시장에 내 놓았다면 쉽게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일부분이자 자식과도 같은 컬렉션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보겔 부부의 이야기를 공감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어리석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겔 부부는 검소한 모습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색깔 있는 삶을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보여진다. 젊은 미술가들의 친구, 끝까지 절제하고 초심을 잃지 않아 미국 전역에 훈훈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그들의 모습에 도전 받은 제 2, 3의 보겔 부부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김민희 예술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