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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 물, 바람이 만드는 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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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 물, 바람이 만드는 흰색

[염장 김정화의 전통염색이야기(43)] 백색

백색은 오방색 중에 서방에 해당한다. 오행이론은 필자가 논할 일이 아니어서 왜 그리 되었는가는 정확히 모른다. 단지 염색하는 이로서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을 합하여 나오는 색인 검정과, 삼원색에서 색을 모두 빼 버린 것이 백색이란 점, 그리고 이렇게 분명한 논리를 가진 무채색인 흑과 백의 두 가지 색이 오방색의 근간이 되는 것은 지당하다는 생각이다.

백색은 염색할 수 없다. 1970∼1990년대 채록을 다니던 시기에 필자가 수집한 전통 직물로 만든 1000여점의 서민복색에서는 잉물, 쪽물, 검은 물외엔 물색 옷을 보기가 어려웠다.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된 19세기말 20세기 전반, 초기의 기록 사진들 속에서도 양반들을 뺀 서민들은 색옷이 흔치않다. 1957부터 1971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며 나자렛 대학을 설립한 엘든 코넷(Eldon Cornett. 1924-)이 지난달 필자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 당시 촬영한 수 백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한국에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눈에 확 띄었던 것은 당시 시골 장날 모습을 촬영한 것들이었다. 1935년 일제강점기 때 '백의퇴산(白衣退散), 색복장려(色服獎勵)'가 강제되었고(2014년 1월 21일 필자칼럼참고) 이미 화학염료가 보편화된 지 20년이 지난 시기임에도 사진들 속의 시골사람들은 여전히 흰옷을 즐겨 착용했다는 점이었다. 사진 기록은 많은 것을 증명한다. 전통염색법은 염색법이 어렵고 비싸 색옷을 입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화기,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까지도 흰옷을 즐겼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상관이 깊다고 본다.

채록을 다닐 때 가는 곳마다 시골 노인들에게 색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항상 물어 보았다. 학교 공부가 시작되던 시기부터는 도시 농촌 구분 없이 쓰는 용어가 획일화되어 비슷비슷하다. 1930년 이전의 출생자들은 무학이 많았고 그분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저마다 달라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재미있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로 하얀색을 지칭하는 '소색'이란 말이다.

소색(素色)이란 말은 국어사전에서도 잘 볼 수 없는 말로 흰 베, 즉 무명이나, 명주 베, 모시 베의 색을 지칭하는 노인들의 말이다. 소색의 素는 본디, 바탕, 성질, 희다, 질박하다는 뜻이다. 베를 짜서 베틀에서 내린 베의 색깔을 소색이라 말한다. 질 좋은 목화로 짠 하얀 무명베도 소색이고, 태 모시를 찢어 짠 노르스럼한 것도 소색이고, 고치로 짠 상아색 명주베도 소색이었다. 경상도 시골에서는 소색이란 말은 흰색, 백색과 같은 의미로 썼다.

무명의 흰색과는 분명 서로 다른데 왜 모두 소색이란 말을 쓰냐고 물었을 때, 따로 더 물을 들이지 않으니 그게 그거라고 했다. 굳이 하얗게 만들자면 오래 입어 세탁을 많이 하면 절로 흰색이 되고, 시아버지의 두루막 감이나 시집갈 딸의 이불감으로 흰색을 만들자면 손이 더 가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 방법은 소색의 베를 물에 푹 적셔 하천의 돌이나 가시나무 위에 널었다가 마르면 적셔 널고, 적셔 널고 하기를 몇 날 며칠을 거듭 반복하면 하얗게 된다고 했다. 햇빛은 물론이고 달빛이나 바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흰색은 해, 달, 물, 바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색을 먹어버리면 베 위에는 흰색만이 남는다. 해와 달, 물과 바람, 그들만이 흰색을 물들이는 것이다.

/김정화 전통염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