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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자색·가짓빛 내는 염재는 자초(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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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자색·가짓빛 내는 염재는 자초(紫草)

[염장 김정화의 전통염색이야기(45)] 자색(Ⅱ)

해뜨기 바로 직전, 그리고 해가 지고 난 바로 뒤의 하늘 빛깔은 참 곱다.

오늘 저녁, 창 너머 서쪽하늘 빛이 너무 곱다. 영어를 가르치던 아일링 선생님이 이 빛을 twilight이라고 했다. 박명이라 번역되는 트와일라잇은 불꽃색에 청색이 더하여 생긴 빛이다. 이 색은 몽환적인 보라 빛이 되어 사람을 꿈꾸게 한다.
순간 몽유병자처럼 어린 시절 과수원 외딴집으로 살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친구도 없는 외딴집, 혼자 놀던 계집아이의 소꿉살림, 그래도 장독간 돌계단 아래 청보라빛 제비꽃이 피는 날은 사금파리 그릇에 보라색 꽃 이파리 반찬 담고, 볼고스레한 꽃봉오리 국그릇에 담고, 덜 익은 하얀 씨앗은 밥그릇에 담았지. 엄마 밥 드세요. 와 곱네, 오늘 정화시집 가는 날인가? 바쁜 엄마도 미소 짓게 하던 그 보라색 제비꽃, 눈을 감을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하리.

뒷동산 할머니 산소 주위에 올망졸망 피던 붉은 자주색 대궁이의 꿀풀 꽃은 보라색이었다.

‘이 꽃 이름이 뭔데요’ 라고 물으니 어머닌 ‘가지색을 닮아서 가지중치라고 칸단다’. 가만히 엎드려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할머니 치마폭에 안긴 것 같았지. 외할머니가 먹이던 누에, 그 때 뽕잎에 담아 주시던 빨간 오디색도 자주색이었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나를 잡아끈 포근한 자주색, 그 꽃자주색을 여태 잊지 못한다.

고촌초등학교 앞마당 화단에 줄지어 피던 붓꽃의 색은 어찌 그리 곱던지!

그 붉은 보라색 꽃 이파리 속, 잎자루에 그려진 호롱불 같은 노랑색은 누가 칠했을까?
학교가 파한 시간, 집으로 가는 것도 잊게 만든 그 청보라색을 나는 여태 잊지 못한다.

모든 분홍색 꽃의 꽃봉오리들은 보랏빛이었다.

이른 봄, 지게 위 나뭇단에 꽂혀있던 진달래 꽃 봉오리는 보라색이었다.

험상궂은 가시위에 임금님처럼 앉아있는 엉겅퀴의 꽃봉오리도 보라색이었다.

봄나물로 무쳐먹던 조뱅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뽐내던 꽃봉오리도 보라색이었다.

초당골 작은 할배집 가던 산길에 무더기로 피던 싸리 꽃의 봉오리도 보라색이었다.

너른 바위를 덮은 넝쿨에 강아지 꼬리처럼 매달린 칡꽃의 봉오리도 청보라색이었다.

꽃밭 귀퉁이에 무성하던 작약의 구슬처럼 동그란 꽃봉오리도 보라색이었다.

한낮 무더위에 지쳐서 빼빼 마른 가지에 매달린 과꽃도 자주 보라색이었다.

소먹이 꼴로 키운 지천으로 핀 자운영 꽃봉오리도 보라색이었다.

볼 때마다 설레는 도라지의 꽃봉오리도 보랏빛이었다.

근엄하시던 아버지의 목덜미 같았던 자목련의 꽃봉오리는 자주색이었다.

도로변 길섶의 사방용 족제비싸리, 그 못난 이름위에 정말 귀티가 나는 자색 꽃이 핀다.

보라색, 자주색을 잎과 꽃에 다 담은 온통 보라, 자색인 것이 있으니 그것이 가지다.

연안댁 할머니도 잉물의 최상을 보라, 자색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가짓빛이라고 불렀다.

세상의 이 모든 보라, 자색, 가짓빛을 내는 염재가 있으니, 주치라 불리는 자초(紫草)다.

/글로벌이코노믹 김정화 전통염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