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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류황색의 정수…납작감의 땡감이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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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류황색의 정수…납작감의 땡감이라야

[염장 김정화의 전통염색이야기(52)] 류황색 Ⅳ

[글로벌이코노믹 김정화 전통염색 전문가] 할머니 손등처럼 깡마른 껍질을 달고 죽은 듯 말라있던 3월, 포르스럼하고 반질반질한 새순이 아기 새 부리처럼 어여쁜 4월.

모차르트가 쓴 노란 가발인양 끝을 살짝 감아 부친 꽃이 피는 5월, 주름 접은 꼭지를 접시삼아 얹혀서 꿀을 입힌 쑥절편처럼 웃고 있는 6월.
꿀밤만큼 단단하고 알밤만큼 토실해진 납작감의 땡감이 씨름꾼처럼 우쭐대는 7∼8월,
그 칠월이면 나는 마치 견우를 만나러 가는 직녀처럼 가슴이 한없이 설레었다. 견우직녀는 7월7일 단 하루였지만 내게 칠석은 한 달이었다.

새벽 4시. 살며시 대문을 열고 감나무 밑에 세워둔 차를 탄다. 집에서 가장 먼 선원리부터 사천리, 대전동, 괴연동까지 골목골목을 누빈다. 어느 집, 어떤 감나무가 얼마만큼 차려 놓았을지 훤히 아는 나로서는 한 집도 빼놓을 수 없었다. 태풍이나 가뭄비가 지나간 다음, 그다음 날은 상다리가 휘어진 잔칫상이었다. 옆자리 뒷자리에 가득가득 땡감을 싣고 집에 돌아오면 오전 7시, 출근 전까지 감즙을 짠다.

아! 그 만찬! 스무 해 동안 행복했었던 그 만찬은, 아직도 꿈속에서 나를 배부르게 만든다.

풀 씨 묻은 고무신에 얼룩진 반바지, 얼룩덜룩 기미에, 손톱 밑이 새까만, 살짝 돌아버린 여편네가 새벽마다 자기 집 바깥마당, 담벼락 밑을 들락댄다고, 재수 없다고 물 세례를 준 젊은 농꾼. “끌끌, 이즘도 배가 고파 우린감 만드냐”며 깨끗이 비질한 마당 끝에 바구니 담아 소복이 모아 주는 할머니 댁. 이래도 저래도 신이나기만 했던 땡감 줍기는 아직도 즐거운 추억이다.

줍는 감은 반드시 납작감의 땡감이라야 한다. 고종시나 둥주리감의 풋감은 떨어지는 순간 땡감이 아니다. 감은 이슬이 진 새벽에 떨어진 것이어야 한다. 낮에 떨어진 감은 떨어지자마자 햇볕과 땅기운에 끌려 금시 물러진다. 착즙할 때 물러진 감이 단 하나만 들어가도 한 바구니의 땡감이 이리저리 엉겨 감 즙의 양이 줄어지고 발효가 시작된다.

이 무렵의 땡감은 감 이파리와 색이 꼭 같아서 곶감 감 따기 명수 김현철 할배도 딸 수가 없다. 어디쯤 달렸는지 알 수 있으려면 적어도 감 얼굴에 놀놀한 색이 들어야만 한다. 그전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아무도 따주질 않는다. 땡감을 따주라고 갖은 아양을 다 부리자면 마음 약한 농부들은 아예 톱을 들고 나온다. 할 수 없이 감 주우러 다니는 거지 행세를 스무 해나 하고 다녔다. 그래서 감물들인 바탕천이 집 하나를 가득 채웠다.

감물에 천착한 이유는 단하나.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직물이라도 그 물성을 더 강하게 하므로 수 십 차례나 물들일 천들에게 보약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한 짓은 두 번하기 싫어하는 성질이다 보니 필마다 다른 색과 자락자락 다른 무늬다. 감즙으로 물들인 단색은 연갈색에서부터 검붉은 갈색까지 수 십 단계의 색이 나온다. 류황색이라 말하는 월라말의 빳빳한 갈기 색까지도 감물로 만들 수 있다.

/글로벌이코노믹 김정화 전통염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