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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 최고의 아이들(44화)] 제주도에는 선녀와 나무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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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 최고의 아이들(44화)] 제주도에는 선녀와 나무꾼이 있다

제주도에는 선녀와 나무꾼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은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선녀와 나무꾼은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이며, 현 세대에게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난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말 반가운 교실이 있었고, 난로 위의 도시락과 익숙한 교과서, 어디선가 뛰쳐나올 것 같은 친구들, 그 시절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까마득하지만, 교탁 위에 서 있는 듯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나는 수학여행 인솔교사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전시된 교복을 입기에 바빴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은 웅성거리고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다들 교복이 잘 어울린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준다.

그 당시 교련 수업의 상징인 나무 총과 인조 고무 총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련에 대한 추억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차려의 아픈 추억 때문인지 반갑지가 않았다.

이런 반갑지 않은 추억들은 선녀와 나무꾼을 찾은 어르신들과의 짧은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다. 60~80년대 시장의 모습을 전시해 놓은 곳을 지나다가, 구성지게 우리의 민요를 부르시는 어머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어머님, 민요 자락이 구성진디유. 옛 추억을 생각하시면서 부르시니 더욱 신이 나지유,”

“수학여행 인솔 선생님인가 보유, 신이 나기는 뭐시 신이 나것어. 선생님도 고생 많이 혔것지만, 아유, 징그러워, 지그지긋하다구, 여그를 와 데리고 왔는지 모르것어. 넘들은 추억이라지만, 우리들은 지겹고 생각허기도 싫어, 정말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전쟁이었거던......”
“......”

“선생님, 너무 무거운 아야기인가 보네여.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지두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내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선녀와 나무꾼을 찾은 어르신들과의 이별의 인사를 마치고 걷던 중 떠오른 시가 하나 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의 ‘찔레꽃 받아들던 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참 묘한 우연이다.

평상시 잘 생각나지 않던 시인의 시가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보니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어리시절 시골에서의 생활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 김용택 시인의 ‘찔레꽃 받아들던 날’은 이 땅의 사람들과 산천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찔레꽃 받아들던 날

김용택
오월의 숲에 갔었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숲속을 찾아드는 햇살은
아기 단풍잎에 떨어져 빛나고
새들은 이 나무 저 가지로 날며 울었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천천히 흔들리고
우리도 따라 나무처럼 흔들리며
마음이 스치곤 했네
아주 작은 자갈돌들이 뒹구는
숲속의 하얀 오솔길
길섶의 보드라운 풀잎들이
우리들을 건드리며 간지럽히고
나는
난생 처음 사랑의 감미로움에 젖었다네
새로 피어나는 나뭇잎처럼 옷깃이 스치고
풀잎처럼 어깨가 닿고
꽃잎처럼 손길이 닿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몰래 손이 잡히었다네
아,
숨이 뚝 멎고
빙그르르 세상이 돌 때
다람쥐 한 마리가 얼른 길을 질러가네
따사롭게 젖어 퍼지는 세상의 온기여
새로 열리는 숲이여 새로 태어나는 사랑이여
서로 섞이는 숨결이여
여기는 어디인가
숲은 끝이 없고
길 또한 아름다워라
우리들의 사랑 또한 그러하리
걷다가, 처음 손잡고 걷다가
한 무더기 하얀 꽃 앞에서
당신은 나에게 꽃 따주며 웃었네 하얀 찔레꽃

오월의 숲에 갔었네
그 숲에 가서
나는 숲 가득 퍼지는 사랑의 빛으로
내 가슴 가득 채웠다네
찔레꽃 받아든 날의 사랑이여

이 세상 끝없는 사랑의 날들이여 !
바람 불고 눈 내려도
우리들의 숲엔 잎 지는 날 없으리

(김용택, <강 같은 세월>, 창비시선, 1995)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김용택 시인의 ‘찔레꽃 받아들던 날’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사랑을 기억하게 한다. 그 기억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특히, /오월의 숲에 갔었네/그 숲에 가서/나는 숲 가득 퍼지는 사랑의 빛으로/내 가슴 가득 채웠다네/찔레꽃 받아든 날의 사랑이여/에서는 천진난만한 익살과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의 본성과 자연이 하나되는 행복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제주도에는 선녀와 나무꾼이 있다.

짧은 시간 만나 선녀와 나무꾼의 추억이, 김용택 시인의 시구처럼, /이 세상 끝없는 사랑의 날들이여 !/바람 불고 눈 내려도/우리들의 숲엔 잎 지는 날 없으리/처럼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길 소망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박여범 용북중 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
박여범 용북중 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
10년 혹은 20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사랑하는 제자들이 사랑하는 사람, 가족, 새로운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이곳 선녀와 나무꾼을 찾아 중학교 사춘기 시절의 수학여행을 생각하며, 웃음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녀와 나무꾼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학여행 코스로 기억되기 보다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우리가 기억하고 돌아다보며,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장소였으면 좋겠다.

그들이 만나는 제주도의 ‘선녀와 나무꾼’도 여전히 행복하길 기도한다.
박여범 용북중 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