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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참된 주체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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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참된 주체가 되라!"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27)]

인간은 자기 실현보다 자기 극복을 해야 하는 존재

목표 보기 위해 고개 돌리면 불안·초조·조바심 생겨
밖에는 벌써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들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황량한 들판이 되어 가고 있구나. 밖의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게 되면 마음은 쓸쓸해지고 우울해지게 돼. 들판을 바라보면 볼수록 황금들판이 완전히 무(無)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도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결국 죽고 나면 무(無)로 변해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지. 그루야, 바로 이것이 인생의 허무이고 들판을 바라보면서 허무한 인생에 대해서 더욱 생각하게 되는 거야.

그루는 입시 준비로 바쁘다 보니 아마도 이런 허무에 대해 생각할 만한 여유조차 없을 것 같아. 그루는 지금까지 꿈을 키워왔고 아직도 이루어야 할 꿈과 비전이 있어. 그루가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전진하는 것도 좋은 일이야. 그러나 한 번쯤은 이런 허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인생을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다고 해서 너무 허무한 인생에 대해 깊이 빠지지 말고. 왜냐하면 황량한 들판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무로 변해버린 들판을 볼 수 있는 눈은 있으나 곡식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곡식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거든.

황금들판도 결국에는 무(無)가 되듯이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인생도 죽고나면 무로 변하게 된다.이미지 확대보기
황금들판도 결국에는 무(無)가 되듯이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인생도 죽고나면 무로 변하게 된다.
선생님은 이번 편지에 그루에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올 해가 가기 전에 그루가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어. 그루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위해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선생님을 소개하고 싶다. 사람들은 주로 그를 우울, 불안, 절망을 말한 철학자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큰 오해야. 그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병' '불안의 개념' 등이 있어. 아마 이런 책들 때문에 오해가 생겼을 거야. 이런 책들 이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을 썼어. 키에르케고르는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마 그만큼 많은 양의 책을 쓰고 죽은 철학자도 드물거야. 그는 사상집과는 별도로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아놓은 강화집을 출판했는데, 선생님은 오늘 그 강화집의 내용을 소개하고 싶구나.

옛날에 이방인의 현자가 있었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 "신들은 축복을 받은 것이네. 왜냐하면 신들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 우리도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네. 의복은 단 한 벌이면 충분해. 음식도 영양공급을 위해서만 먹어야 한다고. 부와 명예는 경멸해야 해. 음식은 채소만 먹고 물도 찬물만 마셔야 한다고. 거주할 곳도 초라한 은신처나 텐트만 있으면 만족하지." 그랬더니 그 옆에 현명한 사람이 앉았어. 왜냐하면 현자는 적은 양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야. 그루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완전성이란 정말로 적게 필요로 하는 것일까? 혹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일까? 과연 누가 더 완전한 사람일까?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더욱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일까? 아니면 정말로 적은 양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까?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아마 그 중에 하나가 그루일거야.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팔리는 이유도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지 될 수 있으면 적은 양만을 갖고 살고 싶어 하지 않아.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꿈과 비전을 크게 가꾸라고 해. 내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생생하게 꿈을 꾸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거지. 자아실현도 마치 이와 같은 거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처럼 그루가 누구인지 이해하고(자아 정체성) 그루가 가지고 있는 잠재 가능성을 실현하면 자기가 세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지(자아 실현).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는 오늘날 문제가 있어. 왜냐하면 옛날에는 자아실현을 인격의 완성으로 이해한 반면 오늘날에는 오직 자아실현이 성공으로 경도되는 모습을 보게 돼. 결국 오늘날에 사람들이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는 성공을 위한 것이고 더 많은 것으로 채우기 위한 거야. 사람들은 도덕적인 인격의 완성과 같은 어려운 과제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을 싫어해. 오히려 자아실현이란 부를 축적하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될 수 있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바꾸어 놓고 그런 것들을 실현해야 하는 것처럼 보여. 그러나 선생님이 키에르케고를 이해할 때,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을 거부해. 즉, 자아실현이라는 자체도 문제가 있고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거야.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거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이나 목표와 비전을 설정해 놓고 살아가는 삶도 문제가 있다는 거야. 만약 그루가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혹은 비전을 따라 산다면, 성공과 비전의 노예가 될 뿐이야. 그것은 참된 자유도 아니요, 참된 주체도 아니라는 거야.
조경경기 선수가 경기 도중에 목표지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시합에서 패하듯이 우리도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목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안, 초조, 조바심이 생기게 된다.이미지 확대보기
조경경기 선수가 경기 도중에 목표지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시합에서 패하듯이 우리도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목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안, 초조, 조바심이 생기게 된다.
조정경기의 예를 들어보자. 조경경기 선수는 노를 저을 때, 배는 선수의 뒤쪽으로 가게 돼. 그러면 목표지점은 선수의 뒤에 있게 되고 그는 자신이 목표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 볼 수 없어. 만약 그가 목표지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아마도 그는 시합에서 패하게 될 거야.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우리는 인생을 조정경기 선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야.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목표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불안, 초조, 조바심만 보인다는 거야.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봐. 연극을 보러 가면 객석에 있는 조명은 모두 끄고 무대 위에 조명만 키게 돼. 연기자가 연기를 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올라가게 되면 조명이 너무 강해서 객석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해.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는 연기에 집중할 수 있어. 만약 연기자가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객석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다는 것이 보이거나 인기척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다면 아마 그는 긴장해서 연기에 몰입하기 힘들지도 몰라. 그가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도 객석은 충분히 어두워져야 해.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사람처럼 우리의 인생은 미래가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충분히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거야. 오직 그때에만 현실의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거지.

처음에 선생님이 그루에게 말했던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서는 자기를 실현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어.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고 자기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거야. 새가 아무리 멀리 날아가 아무리 많은 것을 본다 할지라도 새는 '내일'을 볼 수 없어. 들의 백합화가 '내일'은 아궁이의 불 속에 던져질지라도 '오늘' 활짝 필 수 있는 이유는 '내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이야.(마태복음6:30) 그러나 인간은 내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 바로 내일을 보기 때문에 내일로부터 염려가 발생한다는 거야. 성경에 보면 잠언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 "자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언16:32)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극복하기 원한다면, 먼저 '내일'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해.

사람들은 "꿈을 가져라, 내일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다 신기루야. 내일은 변장한 영원일 뿐이야. 내일을 생각하면서 염려하는 자는 스스로 판사가 되어 종신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평해.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내일로부터 완전히 고개를 돌려 오늘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야. 사람은 오직 오늘을 살아 내야만이 자신을 극복할 수 있대. 아마도 사람들은 세상을 얻기 위해 싸울 거야. 다시 말해, 성공, 행복,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싸우지. 그러나 그에 의하면, 진정한 주체는 세상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아. 그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싸워. 이 세상을 정복한 왕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참된 승리일 수 없듯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 싸우는 주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그것은 자기 자신이야. 그러므로 이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싸움의 승리는 오직 믿음뿐이래.

아마 그루가 선생님 얘기를 듣고 혼란스러울 수 있어. 왜냐하면 이것은 비전을 꿈꾸고 이루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지. 오히려 그런 비전을 버리고 살아야 할 것처럼 보여. 어느 것이 맞는지는 그루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거야. 선생님은 이런 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이 맞다면, 사람은 조정경기 선수처럼 오늘 저어야 할 하나 하나의 노에 집중해야 해. 그 작은 사명 하나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비전을 세우고 멀리 보는 일보다 중요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 대단한 것이 아니야. 인생은 대단한 일을 위한 기회일 뿐.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오늘 주어진 작은 사명 하나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영원을 얻는 일이야. 선생님은 소포클래스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기다렸던 내일." 공부도 중요하지만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그루가 되길 바란다. 독감이 유행이니 건강관리 잘하고 수능 마무리 잘 하렴.

2015년 10월 28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창우(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