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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 더 많이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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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 더 많이 존재할 것인가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28)]

사르트르 "선택과 책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유는 형벌이다"

프롬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인간심성 바뀌어야 위기 극복 가능"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선생님은 수능을 앞둔 그루가 한번쯤은 깊이 사유해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이 세상 생명 가진 모든 것들 중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며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지.

지난번에 선생님이 참된 주체로서의 삶을 들려주면서 수능이 끝나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루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답했지. 하루 종일 푹신한 이불 속에서 실컷 꿀잠을 자는 것, 과자봉지를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TV를 보는 것, 문제집이 아니라 정말 읽고 싶었던 하루키의 소설들을 쌓아놓고 질릴 때까지 읽는 것이라고. 그날 그루는 결국 ‘자유’를 원한다는 말을 한 것이란다. 부모님의 잔소리나 선생님의 지시도 당위가 아닌 선택이 되는 정말 ‘자유’말이야.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당연히 자유는 행복의 조건이 되는 소중한 가치란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형벌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자유가 형벌이라니 참 역설적인 말이다.

실존주의는 신의 죽음에서 출발한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해주던 신이 부정된 이후 인간은 모든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지. 이제 인간은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미리 부여받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가야만 하는데 그런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유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 즉 선택을 선택하는 일이란다. 그루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선택을 회피하거나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조차 사실은 자신의 선택인 것이지. 무한한 자유를 가진 인간은 당연히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데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책임과 불안이 따르는 인간의 자유를 사르트르는 ‘저주받은 자유’라고 명명했어. 선택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유는 형벌이 되는 것이지.

이처럼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저주받은 자유는 인간 모두에게 근원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사유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자유는 자기계발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만드는 이상한 형벌로 이용되기도 한단다. 어른들은 입을 모아 대학에 가면 자유가 주어진다고 말하지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각종 스펙을 쌓아야만 하는, 청춘들에게 허락된 자유는 스스로를 계발할 자유 그리고 물건을 소비할 자유 정도뿐이거든. 자본주의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꾸준히 발언하고 있는 엄기호 교수는 긴 학업을 통해 간신히 얻어낸 대학생들의 자유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 쌓기에 이용되고 있는지를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지.

왜 자본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대학생들에게 요구할까? 현재 체제가 잉여를 해소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잉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 실업을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하였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60-61쪽

실존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사르트르는, 이미 오래전에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진단을 내놓았단다. ‘자유가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는지 설명해주지 못하는 자유이론은 사실상 끔찍한 착각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자유이론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유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고 믿는 것 역시 끔찍한 착각이다’라는 견해를 펼쳤거든. 그리고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남들을 따라 살면서 그 안에서 평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대중적 삶을 ‘순응주의’라고 부르며 경계했어. 이렇게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는 형벌이 되지.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이 ‘저주받은 자유’를 ‘축복받은 자유’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불편하고 힘들어도 현실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좋은 것을 선택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야만 한단다. 우리 그루가 여러 선생님들이 보낸 인문학편지를 읽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름의 판단기준들을 세워나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긍정할만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프롬은 ‘인간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주장에 감응하여 『소유냐 존재냐』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가 소유양식의 삶을 버리고 존재양식의 삶을 살아야하는 까닭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단다. 프롬은 현대사회의 문제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것 외에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는 것, 즉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인의 심성구조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단언해. 현대자본주의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소유지향적인 인간심성을 존재지향적인 것으로 변화시켜야만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프롬이 말하는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이란다.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고, 감정, 행위의 총체가 결정되는 성격구조지. 안타깝게도 이미 소유 지향적 존재방식은 모든 산업사회의 특징이 되어 버렸어. 자본주의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야. 이렇게 구조가 부여한 소유 지향적 삶의 방식을 별 생각도 없이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내면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현대 사회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문제에 부딪혀 이미 병든 상태라고 볼 수 있어.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탐욕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 사회를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니.

현대의 소유 지향적 정신은 소비주의적 정신과 결부되어 있어. 소비라는 것은 어떤 것을 먹고 마시는 데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을 내게 편입시키는 것이지. 다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나를 강화하겠다는 심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거야. 대상을 단순히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려는 소비행위, 즉 소유양식에서 나와 대상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 대상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예속된단다. 이렇게 소유양식에서는 나의 정체성과 존립이 내가 소유하는 것의 양과 질에 의해 결정되므로 나는 되도록 더 많이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힘을 추구하게 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을 사용해야만 하고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의지는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욕망을 낳기도 하지. 그래서 소유에의 욕망이 지배하는 인간관계는 결국 갈등과 질투로 가득 차게 되는 거야.

물론 프롬이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소유마저 부정하는 건 아니야. 프롬이 비판하는 것은 소유에서 행복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는 성격학적인 소유란다. 배고픔과 같이 일정한 포화점을 지닌 생리적 욕구와는 대조적으로 성격학적인 소유욕은 포화점이 없거든. 그것을 아무리 충족시켜도 내적인 공허감과 권태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 소유와 소비는, 우리가 자신을 세계와 대립되는 고립된 자아로 생각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야. 하지만 그것은 삶의 불안과 외로움을 해소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심화시킨단다. 이런 소유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 더 많이 소유하지 않아서 불안하고 외로운 것이라고 착각하며 끝없이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하는 탐욕의 굴레에 영원히 갇히고 마는 것이지.

소유 지향적 삶을 극복할 대안으로 프롬은 존재 지향적 삶을 내세운단다. 그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존재 지향적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존재양식에서 나는 자신을 세계와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세계와 자신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느낀단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인간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그들의 성장을 도우려고 하지. 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서 충만한 만족을 느끼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돼. 소유양식에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우위 속에, 자신의 힘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복하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양식에서 행복은 사랑과 공유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 있단다.

프롬은, 모든 사람이 소유 지향적 성향과 존재 지향적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며 둘 중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은 약화되는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어. 존재 지향적 성향을 강화시키기 위해 프롬은 자신의 철학을 실제 삶에서 꾸준히 실천하며 살았단다. 자신이 지향하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당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면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미국사회의 변혁을 위해 노력했지. 무엇보다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평화운동에 주력했는데 미국만이라도 군비를 축소할 것을 주장하고 스페인과 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데에도 참여했어. 철학자 마르틴 부버와 함께 아랍인들에게 전에 소유했던 재산을 되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를 세우려고도 했고. 이렇게 바쁜 생활 속에서도 프롬은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명상을 하고 오전에는 절대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살았다고 하는구나. 프롬도 간디처럼, 철학은 이해하는 일보다 사용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실천하는 지성이었던 거야.

그루가 대학생이 되어 네게 주어진 자유를 소유 지향적 스펙 쌓기에 사용할 것인지 존재 지향적 삶을 위해 쓸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선생님의 편지 아니 마르크스와 사르트르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충고를 기억해주면 좋겠구나. 그 선택 앞에서 망설임이 생긴다면 가만히 그루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렴. 그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루가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선생님은 믿는다. 더불어 시간이 나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구나. 무엇이 진리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이 혼란스런 시대에 그래도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비자발적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통로 역할을 해준단다.

오로지 생존에 급급해야하는 거친 세상을 너희에게 물려준 기성세대로서 선생님도 책임을 느낀단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그루에게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런 조언들뿐이어서 미안하고 안타깝구나. 하지만 그루야. 험한 외부세계를 넘어설 방법을 자신의 내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란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희망만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자신이 살던 시대가 소란과 광기의 시대였기에 그 험난한 시대를 극복할 방법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프롬은 말한단다. 그 광기의 시대가 무진장한 사회적 실험실이 되었다고 말이야. 그러니 그루야.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 가슴 속에 사랑과 희망만은 가지고 살자.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말고 씩씩하게. 수능까지 남은 한 주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렴. 다음 편지로 만날 때까지 그루야, 그럼 안녕.

2015년 11월 4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은정(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