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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81)]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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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81)]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예술가란, 예술이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하며 그 시대를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의 정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현재를 기록하기 위해 어제의 그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를 읽는다.”(최예선 작가의 ‘들어가는 말’ 中에서)

학교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다소 두껍고 작은 글씨체로 인해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읽고 나니 힐링 캠프를 다녀온 느낌이었습니다. 일에 몰두하다가도 그저 잠시 쉬고 싶을 때 이런 책은 나를 조금(?) 슬프게까지 합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몰라보았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되는 책. 편하게 잡을 수 있는 크기(145mm*188mm)의 책에 자주 등장되는 흑백 삽화와 칼라 사진들(1/3~1/6 크기)도 구석구석 훑어보게 되는 재미와 묘한 집중력을 안겨줍니다. 내 장점이자 때로는 단점이기도 한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참 자잘 자잘한 기억도 잘 하는 작가가 잠시 부러웠고, 또한 책 속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폭넓은 감싸 안음과 글로 펼칠 수 있는 멋진 능력이 많이 부러웠으며,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기꺼이 전달해주어 읽는 이들의 힐링을 도와주니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이 책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와 따끈한 커피 한 잔이면 푹 빠져드는 혼자만의 아주 여유로운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마치 대학 때 종종 읽곤 했던 두꺼운 전집 중의 한 권을 들춰낸 기분입니다. 잔글씨로 빼곡한 293쪽 분량은 창덕궁으로부터 발길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책을 읽는 중간에도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있는 행복한 여유로움이 전율할 정도로 깊이 느껴집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최면에 걸리듯 빠져듭니다. 사진과 삽화가 삼분의 일 정도 포함되어 있어 현장감은 물론 예술가와 함께하는 기분을 상상 인터뷰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책장은 의외로 빨리 넘어갑니다. 다 읽을 때쯤엔 다리도 아프고 약간의 신체적 피로도 몰려오는 듯하지만, 스트레칭 한 번이면 기분 좋은 엔돌핀과 더 나아가 다이돌핀(감동 호르몬)을 마구 들이킨 느낌도 전해집니다. 옛 서울의 가상 정경(情景) 속으로 힐링하러 가보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그날의 파인애플을 떠올렸습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열대과일즙이 많고 먹고 나면 입안이 얼얼하게 불편한 그 과일의 맛이 결혼생활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여성으로서의 관능도 파인애플 껍질 같은 공고한 제도적 보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중성 그리고 내재된 통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와 인생을 함께하는 것이 통증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넌지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김선 기자와 나혜석 여사의 인터뷰 글 中/ 128쪽)

서울에 산다고 서울을 이렇게까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날마다 어디론가 가게끔 유혹하는 그 무엇에 홀릴 때 이 책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니, 이 또한 책을 통한 즐거운 인연이 아닐까요? 아침독서편지를 쓰는 시간이 점점 즐겁고 행복해질 따름입니다.
이원정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아침독서편지 연구위원(도봉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