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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인정투쟁을 넘어서…인생의 겨울이 왔을 때 견디기를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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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인정투쟁을 넘어서…인생의 겨울이 왔을 때 견디기를 기도하라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34)]

진리 안에서 오직 한 가지만 품는 게 善

누구에게 인정받기보다 자기자신에게 집중해야
겨울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움츠리게 만들지라도, 반드시 겨울은 가고 말거야. 인생의 겨울이 아무리 길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한 순간 소용돌이로 몰아갈지라도, 인생의 겨울도 반드시 지나가겠지. 중요한 것은 끝까지 견디는 거지. 그루야, 잘 견디고 있지? 인생의 겨울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마. 왜냐하면 인생의 겨울도 반드시 오니까. 오히려 인생의 겨울이 왔을 때, 견디기를 기도하렴. 그리고 오직 한 가지만을 품기를 기도해.

그루야, 편지 보내준 것 잘 읽었다. 선생님이 헤겔의 인정투쟁에 대하여 나눈 얘기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해석하다니 훌륭하다. 그루가 지금 인정투쟁 가운데 있는 것 같다고? 그루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과 상황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그러나 그루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루가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잘한다 할지라도 당장 하던 학업을 포기하고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준비한다면 어떤 부모도, 선생님도 쉽게 찬성하기 어려울 거야. 그루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인정투쟁과 연관시켜 해석했구나. 그루야, 많이 힘들었지? 특히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하고 싶은 일을 인정받지 못하면 더욱 고통스럽지.

그루야, 그럼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지난 번에 선생님과 헤겔에 대하여 나눌 때, 누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인지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한적 있지? 왜냐하면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이 말한 인정욕구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인간이 인정욕구가 있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맞아.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정투쟁 가운데 있는 노예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야. 여전히 누군가의 영향 가운데 있는 주체일 뿐이야. 오히려 인정받기 위한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는 거야. 노예가 죽음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주인에게 저항하며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헤겔은 자기의식을 인정받기 위해 인정투쟁을 하고 있는 노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거야. 왜냐하면 그런 노예야 말로 노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주체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미지 확대보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자유로운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만을 품는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어. 그는 선(善, The Good)은 진리 안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품는 것을 의미한대. 뒤집어서 말하자면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거지. 그럼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그루야, 그루는 오직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은 적이 있니? 너무 설명이 추상적이라고? 그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예로 들어보자. 오직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한 가지만을 품은 것일까? 그루가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일에만 몰입한다면 오직 선만을 구한 것일까?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사람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는 두 마음을 품은 행동이라는 거야. 명예, 쾌락, 권력, 성공, 재산과 같은 것들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행동 역시 두 마음을 품은 것이지 한 가지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이런 요소들 역시 그 동기가 인정받기 위한 결과일 뿐이야. 인정받고 싶어서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을 추구할 뿐이지.

예를 들어 명예와 쾌락을 설명해 보자. 쾌락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오직 한 가지 만을 품는 것, 즉 쾌락을 원하는 거지. 그러나 이것은 마음에 한 가지만을 품은 것이 아니야. 이것은 오히려 다양성이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들은 절대로 쾌락에 만족하는 법이 없어. 메뚜기 떼가 먼 거리에서 보면 하나의 몸인 것처럼 보이듯이, 군중의 시끄러운 소리가 먼 거리에서 들으면 하나의 소리인 것처럼 보이듯이, 먼 거리에서 보면 쾌락은 오직 하나인 것처럼 보일 뿐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쾌락의 다양성이야. 그들은 단 하나의 쾌락에 만족하지 못해.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다가 바로 싫증이 나면 다른 쾌락을 원해.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항상 새로운 쾌락이 공급되어야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만족할 수 없지. 결국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

명예, 권력 혹은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도 상황은 비슷해. 그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추구하는 것 같아. 그러나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판명나지. 키에르케고르는 그들이 오직 한 가지인 명예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이미 분열된 상태라는 거야. 그들은 때로는 굽실거릴 때도 있어. 왜 굽실거릴까? 왜냐하면 명예를 얻기 위해서지. 그들은 심지어 적에게 아첨할 때도 있어. 왜냐하면 명예를 얻기 위해서야. 그들이 경멸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때도 있어. 역시 명예를 위해서야. 심지어 그가 존경했던 사람을 배신할 때도 있지. 명예를 얻기 위해서야. 그들은 결국 명예의 정상에서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들은 그러면서 여전히 변화 앞에서 떨고 있지. 그들은 환경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같아. 변화를 사모해, 아주 신속하고 빠르지.
결론적으로 말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위대함”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것은 결국 분열된 마음이고 한 가지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루야, 어떤 보상을 바라면서 선을 행할 수 있을까? 성공, 명예, 존경, 권력 등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것 자체가 선이 아니라는 거야. 이미 이것은 마음이 분열된 상태라는 거지. 한 쪽 눈은 선을 보고 한 쪽 눈은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결국 눈이 사시가 된다는 거지. 그에 따르면, 선과 보상은 기름과 물과의 관계 같아서 섞일 수 없는 무엇인 것 같아.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오직 선만을 바라보고 보상에 눈을 감아야 하는 거지. 그래야 눈이 사시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올바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

그루야, 우리가 이만큼 엄밀해지자. 이 편지가 모든 것들을 쫓아 버리고 오직 선만이 우리 곁에 남게 하자.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이만큼 확실한 것은 없어.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거야. 성공, 명예, 부, 권력과 같은 외재적인 보상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의심스러운 것들이니까. 하늘의 구름 같고 들판의 바람과 같고 굴뚝의 연기와 같으니까. 좋은 약도 잘못 사용되었을 때 생명에 치명적인 것처럼,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외재적 보상에 눈을 돌리는 순간 그루에게 치명적으로 해를 입힐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루가 처음에 인정투쟁 가운데 있는 것 같다고 선생님한테 이야기 했었지? 선생님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조금 소개했는데 그루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이 맞다면, 그루가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그루가 갑자기 음악을 하기로 생각한 이유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까? 그루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든, 명예를 얻든, 성공을 하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까? 세상을 정복한 왕도 정작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면 참된 승리일 수 없듯이 어쩌면 그루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그루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누구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루야, 겨울은 반드시 지나가는 것처럼 그루의 어려운 시기도 반드시 갈 거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거지. 추운 겨울일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렴. 어려운 시기는 반드시 오고 가지만 그 시기를 이용하여 인생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렴. 그럼 이만.

2016년 1월 20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창우(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