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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위기…인간관계 회복 위해 공동체적 감수성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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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위기…인간관계 회복 위해 공동체적 감수성 기르자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35)]

가난으로 내몰리는 사람 증가는 자본주의 위기 반증

자연의 역습은 자본주의가 직면한 또 다른 그늘
그루에게
잘 지내고 있지? 고교 시절 마지막 방학이라 학교에 올 일도 없어서 해맑은 너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구나. 풋풋한 신입생으로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구나. 그 동안 그루가 멋진 성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너와 함께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웃던 일들이 내게는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몇 쪽의 종이 위에 씌어져 삶의 책이 더욱 두툼해졌다.

오늘은 어쩌면 고교 시절에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이 편지를 끝으로 너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 그루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고 입시 때문에 미뤄뒀던 연애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학업을 마치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서 경력을 쌓으면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거라고 믿어. 그래서 오늘은 10년 후쯤 그루가 살아갈 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흔히 자본주의라고 하지.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인지는 그루도 학교 다니면서 많이 배워서 잘 알 거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을게.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좋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체제에 대해 비판하기도 해. 세상 일이 모두 그렇듯이 자본주의도 빛과 그늘이 있는 것 같아. 자본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빛은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로 인한 물질적 풍요일 거야. 나는 깡촌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절대 빈곤으로부터도 해방되었어.

그럼 자본주의의 그늘은 어떤 것이 있을까? 최근에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가 52조원의 가치를 가진 자신의 페이스북 지분 99%를 평생에 걸쳐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되었지. 그의 놀라운 결단과 선행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 나도 그의 기부가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 미국에서는 과거에도 빌 게이츠를 비롯한 많은 부자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기부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너도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빌 게이츠처럼 기부해.’라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잖아.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미지 확대보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그런데 나는 이런 의문이 드는 거야. 그렇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기부하는데도 왜 세계의 가난은 해결되지 않는 걸까? 그루도 기부를 독려하는 광고에서 본 적이 있지. 굶어서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불쌍한 아프리카의 갓난아이를. 그렇게 많은 기부를 하는데 그 아이들은 왜 아직까지도 가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걸까? 아직까지 세계의 가난은 고사하고 미국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어. 오히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내몰리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만 들리는 거야.

상위 1%의 부자들이 하위 99%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난의 원인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찾기도 해. 자본주의는 오른손으로 기부하지만 왼손으로는 계속해서 새로운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거야.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옹한다는 거지.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가난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야. 적절하게 분배만 된다면 지금의 생산력 수준이면 단번에 세계의 가난이 해결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잖아. 그루야, 그렇다고 기부에 대해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기부가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숭고한 행위인 거야.

그런데 가난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자본주의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구라는 공간적 차원에서 봤을 때, 자본주의가 무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으로 시장이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상품과 원료를 확보하고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만들었어.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하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절멸의 길을 걷게 되는 끔찍한 폭력이 발생한 건 그루도 잘 알 거야. 최근에 개봉한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때, 자본주의가 아메리카 대륙에 침투해 가는 과정을 곁가지로 보여주고 있어. 모피 사냥꾼 휴 글래스는 곰의 습격을 받아 죽음에 직면하는데 돈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존 피츠제럴드는 저항하는 글래스의 아들을 죽이고 부상당한 그를 버리고 달아나.

영화는 피츠제럴드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해 가는 글래스를 통해 인간 정신력의 위대함을 그리고 있어. 하지만 이 영화의 이면에는 돈이 되는 상품이 된 모피를 획득하기 위해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행한 참혹한 폭력의 양상을 반복해서 보여줘. 그리고 버팔로의 두개골로 쌓아올린 거대한 죽음의 더미도 자본의 욕망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기 시작한 상황을 상징적 이미지로 보여줘. 이 영화를 보면서 돈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피츠제럴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

자본주의 시장 확대의 끝은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에 뛰어든 걸 거야. 중국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면서 이제 공간적으로 자본주의의 외연 확대는 끝난 게 아닐까. 아직 인도와 아프리카 대륙이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적 호황이 예외적인 현상이 되고 상시적인 불황이 일상이 된 현실을 보면 자본주의가 해결되지 않는 어떤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 공간적으로 시장이 커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적 경제 위기 상태에 놓이게 된 건 아닐까. 시장이 더 커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상품을 팔아서 더 많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얘기잖아. 그렇게 되면 기업 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고 경쟁에서 뒤처진 기업은 사라질 거야. 어쩌면 몇몇 대기업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야.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미지 확대보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이렇게 시장의 확대를 통한 무한 이윤을 추구하던 성장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치면서 자본은 줄어든 이윤을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만회하려고 했어. 그루도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봤을 거야. 비정규직 노동, 파견 노동, 파트 타임 노동 등이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점점 벌거벗은 존재로 세상의 밑바닥으로 밀려나면서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어. 그리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정보화와 자동화 및 로봇의 상용화는 노동하는 인간을 자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어. 앞으로 사회에서는 인간과 로봇이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경제적인 성장을 하더라도 일자리는 급속히 줄어들 것이라고 해.

물론 새로운 일자리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자본주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전망은 그리 밝지 않은 것 같아. 과거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직 일자리가 급속하게 기계로 대체되었잖아. 그때 일자리를 잃은 분노한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배웠을 거야. 자본주의는 줄어든 생산직에서의 일자리를 서비스 산업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만회했지. 하지만 자동화와 로봇화는 서비스직 일자리마저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어.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직업 702가지를 분석했는데 이 중 10년 후에는 47%가 없어진다고 발표했어. 10년 후에는 지금 알고 있는 직업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다고 예상되기 때문에 미래에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것은 그루에게도 아주 중요해 보여.

그런데 그루야 올 겨울은 너무 따뜻하지. 뉴스를 보아서 알겠지만 이상 고온현상은 슈퍼 엘니뇨 때문이라고 해. 엘니뇨 때문에 기상이변이 일어나 지구촌 곳곳에 홍수와 폭설 등 잦은 자연재해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어. 이런 기상이변의 원인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해. 자본주의가 직면한 또 다른 그늘은 이런 자연의 역습이야.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력을 확보하여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인간만 착취한 것이 아니라 자연 또한 착취하여 심각한 환경 파괴를 자행했어. 인간을 위해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던 자연은 이제 재생불능을 향해 치닫고 있어. 유엔 산하의 IPC가 발간하는 기후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기온이 1.6도 오르면 생물의 18%가 멸종 위기에 놓이고 2.2도가 오르면 24%, 2.9도로 오르면 35%까지 생물들이 절멸할 상황에 놓인다고 경고하고 있어. 또 온도가 1.9도 오르면 태풍과 홍수의 위협이 통계적으로 확실히 증가해 엄청난 피해를 유발할 것이라는 거야.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런 자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류의 절멸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향후 수십 년 내에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점쟁이가 아닌 이상 누구도 미래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겠지. 그렇더라도 변화하는 사회의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필요해 보여. 그럼 앞으로 사회에서는 어떤 삶의 자세가 필요할까?

자본주의는 인간 심성에도 나쁜 영향을 미쳐 피츠제럴드 같은 탐욕적인 인간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어. 몇 년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 이야기야. 경기도 포천에 살던 노 씨는 지난 2011∼2013년 보험금 10억 원 가량을 노리고 음식에 제초제를 몰래 타 먹이는 수법으로 전 남편과 현 남편, 시어머니 등 3명을 살해해 충격을 주었지. 심지어 자신의 딸도 제초제를 먹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해. 보험금을 받은 노 씨는 골드바(순금 덩어리)와 차량을 구입하고, 하루에 백화점에서 수백만 원을 쓰거나 동호회 활동을 위해 2000만 원짜리 자전거를 구입하고, 겨울에는 매일같이 스키를 타는 등 호화생활을 했다고 해. 그런데 돈 때문에 천륜을 저버리는 이런 사건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 씨와 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걸까?

그건 자본주의 체제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진 고립된 소비자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일 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란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나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기 쉬워. 내 구매력을 높이는데 다른 사람이 도움이 되는가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가족도 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가족 간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면 노 씨와 같은 사건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겠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가족과 같은 인간적인 연대의 공동체를 해체하고 사람들을 탐욕에 눈먼 고립된 이기적인 소비자로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거야. 이 사건도 결국 소비에 이끌린 노 씨의 욕망이 빚어낸 참극인 거야.

그루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공동체적 감수성이야. 공동체적 연대의 윤리적 감수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남을까? 고립된 소비자로만 남는다면 점점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불러오는 위험을 감당하지 못할 거야. 위험을 분산하고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도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해 보여. 내가 실직과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나와 연결된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가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진지(陣地)와 같은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과거에는 그런 진지의 역할을 했던 것이 대가족과 친척들, 이웃들이었지.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내 일처럼 생각하고 진심으로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있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그런 전통적인 공동체들은 모두 해체되었지.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실험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어.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SK그룹 계열인 아트센터 ‘나비’에서 전시·공연 관련 팀장까지 맡았던 조대성 씨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이력을 뒤로하고 2010년 아내와 함께 귀농을 선택해. “사람들에게 농사가 찌질 한 직업이 아니라 멋진 직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또 미디어 관련 일을 하면서 전시 후 폐기되는 수많은 쓰레기더미와 엄청난 전기를 소모해야 하는 직업이 제 신념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최소한의 벌이를 하고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젊은협업농장’이라고 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20~30대 청년들 7명 정도가 같이 쌈채소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해.

지금은 소득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협동조합도 만들고 지역에서 여러 가지 운동도 하고 마을 합창단도 만들고 팟캐스트도 운영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어. 물론 이런 삶의 방식에도 갈등과 시련은 있겠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행복을 찾는 것 같아.
서울의 성미산 마을에서 도시 주거 문제를 직접 해결해보고자 의기투합해 코하우징 주택을 짓고 사는 아홉 가구의 이야기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야. 입주자가 설계부터 함께해 주택을 디자인하고 개인의 경제적 부담을 공동이 나눠 해결하고, 함께 이용하고 즐기는 공동의 공간을 가지며 이웃과 마을을 향해 열려 있는 공동 주택을 만드는 거야. 나도 책을 읽고 궁금해서 성미산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1년 만에 벌써 4호 주택을 짓고 있었어. 그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친밀한 이웃을 갖게 될 거야. 이처럼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다양한 실험들이 전개되고 있어.

우리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관계가 살아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앞으로 많이 만들어야 할 거야. 공동체와 연결된 사람은 고립된 개인이 갖는 보잘 것 없는 능력보다는 타인과 무리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더 큰 능력을 획득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의 능력을 내가 전유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지. 그런 공동체라면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생산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강요되었던 노동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것은 아닐까. 자동화와 로봇화가 인간의 직업을 잠식해 수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저주가 아니라 노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축복이 되지 않을까.

그루야, 지금 인류는 어쩌면 생존에 필요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지도 몰라. 지금의 자본주의는 우리의 윤리적 선택에 따라 노동으로부터도 해방되고 가난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생산력과 기술적 수준을 갖춘 사회에 도달한 것 같아. 그루가 그런 윤리적 선택과 실천을 할 수 있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어.

그루야, 얼마 남지 않은 졸업을 미리 축하하면서 편지를 마무리 할게.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봄이 오면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버들잎처럼 싱싱한 생명력으로 가득하길 바랄게. 그리고 그루가 살아갈 미래의 사회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가 되면 좋겠어. 그럼 이만 안녕.

2016년 1월 27일
터기쌤 이유종(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