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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마담 보바리가 들려준, 타자의 욕망에서 탈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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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마담 보바리가 들려준, 타자의 욕망에서 탈주하는 법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36)]

지혜는 좋은 것을 선태하게 하고 책은 그 힘을 길러준다

엠마 보바리의 죄목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죄
봄처럼 따뜻한 날들이 길게 이어지더니 그냥 가긴 아쉬웠는지 이제야 겨울이 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얼마 전에 계절 모르고 핀 개나리를 보았는데 그 여린 꽃잎이 시린 바람을 어찌 견딜지 걱정이다. 올 겨울방학을 그루는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돌아보니 선생님에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건너가는 고3 겨울이 인생에서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도 영화관도 해외여행도 알지 못했고 TV마저 해거름이 되어서야, 장엄하게 애국가를 울리며 시작하던 시절이라 그 긴긴 겨울방학은 정말 따분했지.

무료함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어. 그건 바로 아랫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서 있던 책장에 얌전히 꽂힌 책들이었다. 단행본은 거의 없고 대부분 전집이었는데 과시를 겸한 소장용으로 아버지가 책장수에게 월부로 사들인 것들이었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난해하기로 소문난 '존재와 무'를 소장하지 않으면 교양 있는 중산층의 대열에 낄 수 없다고 여겼던 1940년대 프랑스처럼, 우리나라 1980년대도 세계문학전집 같은 장식용 월부책을 사들이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던 시절이었어. 아무도 읽지 않아 먼지만 소복하던 그 책 속에서 선생님은, 인생을 통틀어 만나게 될 많은 인물들을 마치 예행연습처럼 미리 만났단다. 물론 연습과 실전이 같을 수 없어서 살아오는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데미안, 쥘리엥, 왕룽, 스칼렛,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스트, 히스클리프, 라스콜리니코프, 뫼르소 그리고 엠마 보바리. 그들이 선생님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흥미로운 것들이 지천인 시대를 사는 그루에게 책을, 그것도 고루하게 여겨질지도 모를 세계문학을 꼭 읽어보라고 하는 말은 무척이나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선생님은, 지혜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아는 힘이라면 책이 그 힘을 키워준다고 믿고 있어. 우리 생에 가장 좋은 선택 중 하나가 책을 평생의 친구로 삼는 일이고 책과 나눈 교감은 바른 가치기준을 갖게 해주어 결국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좋은 책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독자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유를 시작하고 그 사유의 끝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찾아낸 답이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걸 선생님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어.

영화 '마담 보바리'
영화 '마담 보바리'
오늘 선생님은 좋은 책이 던진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그루에게 들려주고 함께 생각해보려고 하는데 조금 어렵더라도 잘 들어보길 바란다. 며칠 전에 플로베르의 장편소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영화 '마담 보바리'를 보고나서 다시 '보바리 부인'을 펼쳐 읽었는데 이 책이 선생님에게 예전과는 다른 질문을 던져오더구나. '자살로 스스로를 단죄해야만 했던 엠마 보바리의 죄목은 무엇인가'. 이것이 선생님이 받은 질문이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생님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죄'라는 대답을 얻었단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받는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이는 심리학자 자크 라캉의 유명한 명제중 하나지. 나의 욕망이 내 것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라는 라캉의 또 다른 명제를 전제로 설명하면 그루가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캉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드 덩어리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무의식의 개념을 뒤엎고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나아가 그 무의식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내 무의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대타자(Other-상징계적 타자,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 규범, 이상)'라는 거야. 심지어 대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해. 담론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다수가 입을 모아 옳다고 주장하면 옳은 것으로 인식되는 불명확한 것인데 말이야. 이렇듯 무의식이 대타자의 담론이라면 그 무의식 속에 깃든 나의 욕망도 내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는 이론이 무리 없이 성립되는 것이지. 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나의 진술은 타자의 진술에 의해 구성된 거야. 다시 말해 "나의 욕망은 내가 동일시하고 싶은 타자가 나에게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인 것이지.

그루도 명문대에 진학하고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을 거야. 그것이 정말 스스로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간절하게 솟아난 자신의 욕망일까.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가치 기준이 무의식중에 내 안에 내면화되어 그것을 스스로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가진,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욕망들을 떠올려보면 사실 욕망은 개개인의 주체적 창조가 아니라 절대화된 타자로부터 모방되어, 질투심과 경쟁심 그리고 허영심을 내장한 채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을 해부함으로써 인간 욕망의 메커니즘을 밝혀 낸 또 한 사람,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도 욕망에 대해 라캉과 유사한 사유를 전개한단다. 지라르는 "우리는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욕망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낭만적 거짓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중계자를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욕망 구조에 편입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이 소설적 진실이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나아가 타자에게서 모방된 모든 욕망은 가슴으로 하는 욕망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에 근거를 두고 머리로 하는 욕망이므로 "형이상학적 질환"이라고 진단한단다. 자기 것이 아닌 욕망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존재는 점점 비어가고 그 빈 가슴을 채우려고 더 깊은 탐욕의 늪에 빠져드는 악순환에 갇힌 사람들을 치료가 필요한 병든 존재라고 보았던 거야. 이처럼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는 그 과정에서 더 깊은 자기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어. 모방된 욕망은 충족되어도, 충족되지 못해도 종국에는 인간을 허무와 불행으로 몰아간단다. 보바리 부인처럼 말이야.

자, 이제 다시 엠마 보바리에게로 돌아가 보자. 1857년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장편소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출판 당시 유부녀 엠마와 레옹이 보여주는 사랑의 행각이 사회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까지 되었지만 지금은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로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 그루야, 혹시 '보바리즘(Bovarysme)'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니? 이 소설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아서 이런 심리학용어까지 만들어졌는데 이는 엠마 보바리처럼 현실 속의 자아를 망각한 채 자신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과 그 인물의 삶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를 말한단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현실 속의 자아를 잊어버린 채 헛된 환상을 좇다가 결국 자살이라는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일까. 라캉이나 지라르의 사유를 빌려 대답해보자면 엠마가 자신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온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동일시하고 싶은 타자의 욕망을 간절히 탐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엠마는 여왕처럼 긴 가운을 걸치고 검은 말을 타고 오는 멋진 기사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기를 꿈꾸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으므로 시골의사 샤를의 아내가 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어. 하지만 샤를이 ‘검은 말을 타고 온 기사’가 아니라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남자라는 데서 엠마의 비극은 시작돼. 아니, 사실은 그녀가 사춘기 시절 탐독했던 연애소설 속 여주인공들에게 매료당해서 자신도 그런 낭만적인 여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동경을 품었던 그때부터 이미 엠마의 비극은 발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이후 엠마는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서 모방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주로 외부적인 모습을 모방하는 일로 일상을 채워나가지. 파리 지도를 보면서 낭만적인 도시의 생활을 꿈꾸고 여성잡지를 구독하며 연극, 경마, 연회 등에 관한 기사를 챙겨 읽고 최신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온갖 물건을 사들이는 거야. 시골의사의 아내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파리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사교계 여자들의 몸짓과 억양 그리고 옷차림과 장신구를 모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어. 이제 엠마의 가슴을 가득 채운 허영심이 그녀의 진짜 욕망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마음의 자리를 모두 차지해 버려서 그녀는 점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삶을 더욱 간절히 욕망하며 자기 자신을 잊기 시작해.

드디어 그녀가 애타게 바라던 사랑이 찾아오지만 욕망의 기준을 타인에게 담보 잡힌 엠마에게 사랑인들 제대로 볼 안목이 남아 있었을까. 허영심 가득한 엠마의 욕망을 간파하고 접근한 바람둥이 로돌프의 유혹에 엠마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넘어간단다. 그녀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말을 되뇌며 감격스러워하지만 사실 엠마도 로돌프를 진심으로 사랑한 건 아니야.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사랑한 건 로돌프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낭만적인 모습이었던 거지. 허영에 눈멀어 제 마음조차 보지 못하는 그녀는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며 그에게 야반도주를 요구해. 안타깝게도 엠마에게 돌아온 로돌프의 대답은 매정한 이별 선언이었어.

실연의 아픔도 잠시, 엠마는 전에 서로 마음을 나누다가 시작하기도 전에 헤어져야 했던 청년 레옹을 다시 만나 사랑에 빠져들게 돼. 피아노 레슨을 핑계로 루앙에서 레옹과 정기적인 밀회를 시작하는데 그를 만나러 갈 때 소설 속 사교계 여자들처럼 “영국 말이 끄는 파란색 이륜마차에 승마구두를 신은 마부에게 고삐를 쥐게” 했고 그를 만나는 장소는 반드시 호텔이어야만 했으므로 빚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 그녀의 파멸을 재촉한단다. 게다가 그 하루를 뺀 나머지 여섯 날은 온통 마음이 여기가 아닌 루앙의 레옹에게 가 있어서 그녀는 지옥을 견디는 수인처럼 불행했어. 진실로 사랑하는 자아라면 사랑을 기다리는 그 순간마저 충만한 기대로 가득해야할 텐데 엠마의 기다림은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차 있었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주체는 엠마지만 그것은 소설과 잡지 속 사교계 여자들로부터 모방된 것이므로 그 사랑이 결코 그녀를 진정한 행복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던 거야. 타자로부터 매개된 간접욕망들은 그 욕망을 실현하게 되어도 충만한 행복이 아니라 텅 빈 허무만을 불러오기 때문이지. 엠마와 레옹 사이에도 권태가 스며들 즈음 집으로 압류장이 날아들고, 남편에게 알리겠다는 악덕상인 뢰르의 협박 속에서 엠마는 로돌프에게 돈을 빌리러 가지만 거절당한단다. 이제 엠마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뿐이었어. 타자의 헛된 욕망을 욕망하면서 한결같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던 그녀의 파멸은 어쩌면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던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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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담 보바리'
그루야. 선생님은 이 안타까운 여자의 이야기를 허구가 아니라 “소설적 진실”이라고 말하는 지라르의 생각에 동의한다.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 "내 가엾은 보바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프랑스의 수많은 마을에서 괴로워 울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실 우리도 엠마 보바리의 후예로 타자의 욕망에 휘둘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지.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이라는 무대는 자꾸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부추긴단다. 끊임없는 욕망의 재생산이 자본주의의 동력이거든. 탐욕의 화신인 자본주의는 만족을 알지 못하므로 필연적으로, 만족을 알지 못한 채 끝없이 욕망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야만 굴러갈 수 있는 구조인 거야. 그래서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더 채워야할 빈자리가 있다고 부추기며 인간의 결여감을 자극하는 거지. 계속 사라고 빨리 소비해버리고 다시 새것을 사라고 종용하면서. 가치의 기준을 타자에게 넘겨준 엠마가 상인 뢰르의 권유에 쉽게 넘어가 유행하는 최신품을 사들이며 심리적 만족을 얻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 유행을 주도하는 광고는 내가 부러워하는 타자가 가진 물건을 나도 가지면 그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는 동일시의 심리를 정확하게 자극한단다. 광고는 나날이 정교해져서 이제 간접광고의 방식으로 영화 속에, 소설 속에 대놓고 등장해서 관객과 독자의 욕망을 교란시키고 있어. 엠마를 속인 방식도 절대 거칠고 위협적이지 않았어. 소설과 잡지였지. 문학과 문화라는 세련된 도구 말이야. 이렇게 헤게모니(hegemonie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를 장악한 자본주의 체제는 미디어나 문화를 통해 온건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욕망이라고 속삭이지. 명품가방 하나쯤 갖는 것이 거의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욕망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진품을 가질 수 없다면 짝퉁이라도 들어야 한다는 헛된 열풍이,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강박처럼 여자들의 가슴을 점령했단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어. 가짜라는 게 한눈에 드러나는 짝퉁가방을 들고서 만족스럽게 거리를 걷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난감한 기분이 드는구나.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순된 구조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성실한 생산자인 동시에 적극적인 소비자의 모습으로 체제 안에 안착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을 속이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눈덩이처럼 불려나가는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지키며 평온하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선생님은 우선 이런 욕망의 숨은 메커니즘을 인식하고 현실과 직면하는 것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의 목적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라고 단언했어. 우리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비록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의 생성과정을 아는 것으로 그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제나 인식은 첫 번째 실천이므로 새롭게 구성된 인식이 기존의 흐름에서 탈주하려는 새로운 욕망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 새로운 인식은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경험을 하지 않는 한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다행히 인간에게는 책이 있잖아. 앞서 말한 것처럼 선생님은, 책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깊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믿고 있단다. 그러면 우리의 불행한 엠마도 책을 읽었는데 왜 인식의 전환을 얻지 못하고 파멸해야만 했을까? 엠마의 책읽기가 사유를 요하는 심층독서가 아니라 단지 흥미 위주의 표층독서에 머물렀기 때문이고 그 결과 책이 던지는 질문을 받지 못했고 질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깊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엠마가 읽은 대부분의 책은 가벼운 연애소설이나 여성잡지 같은 것이어서 애당초 사유를 요구하는 질문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거지. 좋은 질문은 좋은 책만이 가진 보물 같은 것이지 사방에 깔린 돌멩이 같은 것이 아니란다. 그루도 책을 자주 읽다보면 옥석을 가리는 안목을 갖게 될 거야.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싶다면 지금 그루에게 조금 어렵더라도 양질의 책을 선택해서 읽어야겠지.

이제 그루는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 같구나. 철학자 강신주는 어떤 욕망이 나의 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 욕망을 실현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지만 완성의 안도감이나 허무감만 남는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야. 그루도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구나. 지금 그루의 가슴이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는지, 아니면 비로소 해냈다는 안도감이나 왠지 모를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루의 가슴이 설렘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루가 타자의 소리가 아니라 가슴 속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사는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적어도 타자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노예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니.

그루야. 돌아보니 너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선생님에게도 반성적 사고의 시간을 만들어 준 것 같아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실 인식했다고 해도 생각한 그대로 살기는 힘든 법인데 너와 교감하는 시간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생님도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어. 이제 정말 그루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아쉽고 서운하지만 어른과 어른으로 마주 앉아 생각 나눌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며 선생님은 언제나 그루를 응원할게.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그루야. 이만 안녕.

2016년 2월 3일
터기쌤 이은정(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