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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변화, 내부역량·여건부터 파악하고 시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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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변화, 내부역량·여건부터 파악하고 시도하라

[우형록 교수의 변화를 넘어 미래로(10)] 그림자 조직 구축으로 생각의 제약 넘어서라

변화의 실패 원인 너무 쉽게
구성원들 탓하는 경향 강해
문제의 80%는 경영진이 야기
회사 내 객관적 지위에 따라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달라
전문가들 '그림자 조직' 권고

충남 서산간척지는 서울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한다. 간척지 사업은 먼저 방조제를 구축해서 바닷물을 둘러막은 후 갇힌 물을 빼내어 육지로 만든다. 그래서 ‘개막은 땅’이라고도 불린다. 제일 어려운 공사는 방조제로 바닷물을 가두는 물막이 공사다. 서산간척지도 1984년에 물막이 공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길이가 6400m가 넘는 방조제의 마지막 200여m 구간을 막지 못했다. 좁아 든 마지막 구간에 초속 8m의 거센 물살이 어지간한 바위도 휩쓸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고 정주영 회장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타개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길이가 322m에 이르는 23만t급 폐유조선을 방조제 앞에 가라앉혀 물살을 막고 신속하게 메우는 작업으로 마무리했다. 토목공학 어디에도 없던 이 방법은 소위 ‘정주영 공법’이라고 극찬을 받으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었다. 공사비를 300억원 가까이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였던 곳에 대규모 영농단지가 조성되었으니 누가 뭐라고 해도 감동적인 역사(役事)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다른 직원들은 왜 그런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을까. 조직 구성원들이 창의적인 대안을 자발적으로 내놓고 실행에 동참하는 것은 대부분 경영진의 바람이다. 현장의 직원들이 문제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지만 경영진의 기대에 부응하는 해결력을 발의하는 경우는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유야 부지기수로 많겠지만 애당초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천수만호는 해체하여 고철로 되팔 목적으로 현대에서 30억원에 구입해 둔 폐유조선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정주영 공법은 30억원의 자산을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공역에 투입하는 의사결정이기도 하다. 실패율도 가늠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이런 고액을 운용하는 아이디어를 직원들이 제시하기란 일반적으로 엄두도 낼 수 없다. 어지간한 직원들은 300만원이 투자되는 제안도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정주영 회장의 창발적 능력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정주영 공법은 회장만이 할 수 있는, 회장이 내놓아야 할 아이디어였다.

조직에서 사람들이 전결권한, 통제범위(span of control) 내에서 사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조직 구성원이 최고경영자(CEO)와 동일한 주인의식을 갖고 서민들이 위정자와 일심동체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CEO와 위정자에 대한 반대 방향의 기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the social existence determines the consciousness)’는 인지상정을 이해해야 한다. 객관적 직위가 그 사람의 사고를 우선 결정한다. 조직 구성원의 의식은 결코 CEO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충남 서산간척지. 고 정주영 회장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막이공사에 성공했다.이미지 확대보기
서울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충남 서산간척지. 고 정주영 회장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막이공사에 성공했다.
역설적이지만 직원 모두가 CEO의 오너십을 갖는다고 기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똑똑한 인재로만 팀을 구성하더라도 반드시 탁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공자는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는 방도로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고 답했다. 군주는 군주의 역할을 잘 하고, 신하는 신하의 역할을 다하고, 부모는 부모의 구실을 잘 하고, 자식은 자식의 구실을 다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 나라와 가정을 세우는 으뜸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조직 변화의 실패를 너무 쉽게 조직 구성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경영진과 관리자가 조직 변화를 성공으로 견인할 역할은 구비하지 않으면서 직원들의 안일함과 소극적인 참여만 문제 삼는다. 제반 여건이나 결핍은 무시하고 인지상정을 비정상으로 규정하여 왜 창의적이지 못하느냐고 강변한다. 여러 성공 사례를 제시하며 우리도 할 수 있다고 구호도 외쳐 본다. 하지만 의지와 열정을 단기적으로 상승시킬 수는 있어도 성과는 실행이 불가능한 제안 몇 개에 그칠 뿐이다. 군주가 해야 할 일을 신하에게 미루고 있지 않은지 재고해야 한다.

경영진이 듣기 거북한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경영의 구루로 데밍(W. Edwards Deming)이 유명하다. 그는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의 80%가 경영진의 무지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데밍은 붉은 구슬 실험(red bead experiment)과 같은 재미있는 실습을 통해 그의 주장을 대중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 실험은 50개의 홈이 파인 주걱으로 통 속에 있는 구슬을 퍼올리는 작업이다. 주걱의 홈은 구슬 하나가 들어가도록 만들어졌으므로 한 번의 주걱질로 50개 구슬을 퍼낼 수 있다. 팀으로 수행되며 한 팀은 생산직 직원, 품질검사관, 경영자로 구성된다. 주걱질을 하는 생산직 직원에게 50개 중에 붉은 구슬이 3개 이상 포함되지 않도록 업무지침이 부여된다. 품질검사관은 주걱의 홈에 담겨 올라온 50개 구슬 중 붉은 구슬의 수를 기록한다. 경영자는 이 기록을 보면서 점검과 목표를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험은 내내 소란스럽게 진행된다. 붉은 구슬의 수에 따라 칭찬을 하거나 호통이 오가기도 한다. 다른 팀의 우수한 생산직 직원이 있다면 가서 관찰하고 더 나은 주걱질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사고 방식과 범위가 직위에 따라 제약되는 문제에 그림자조직은 시스템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너와 나는 하나다’ ‘변화는 당연히 옳으니 모두 따르라’고 섣불리 주장하지 않는다. 각별히 기존 조직의 축소판으로서 수평•수직적 계층이 배태되어 있음에 주목하자. 주위를 둘러보면 공식 조직에 못지 않은 다수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면서 별 소득은 얻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 문제와 유관한 부서들이 연합하여 다기능적인 TF를 조직했지만 수직적 계층을 지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그만한 실무자들만 선발된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어렵사리 해결책이 도출되더라도 실행력이나 조직 전반에 전파할 소통력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소통과 실행은 이슈와 관련하여 최소한 차상위 관리자가 나서야 원활한 추진력이 생긴다. 공식조직과 병렬적 소통을 강조하는 그림자조직의 운영 방식에도 ‘군군신신’의 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통 속에는 흰 구슬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구슬이 20%나 들어 있다. 따라서 50개 중에 통상 10개의 붉은 구슬이 포함되며 3개 미만일 확률은 1%도 채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이 탁월한(!) 주걱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법을 도입하고 개발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구조이다. 데밍은 경영자들이 유행하는 경영기법에 심취하거나 실현이 불가능한 경영 목표에 집착하면서 운영 여건과 역량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는 경영자의 역할과 책임이며 터무니없는 목표와 현실의 간극은 직원들을 절망하게 만든다고 직설한다. 실제로 당시 미국 전역에는 요즘에도 달성하기 힘든 무결점 운동(zero defect movement)이 유행이었다.

각설하고 부여된 역할과 책임에 따라 사고하는 방식과 범위가 제약되는 문제는 조직의 변화와 혁신에도 분명히 걸림돌이다. ‘군군신신’이라 하여 포용될 일은 아니다. 특히 규모가 커지고 관료화된 조직에서 사고와 행동이 소극적으로 위축되는 행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조직개발 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그림자조직(shadow structure)을 구축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림자조직은 잰드(Dale E. Zand)가 부차조직(collateral organization)이란 명칭으로 주창했다. 기존하는 공식 조직과 병존하는 부수적인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부여된 명칭이다. 잰드가 주장했던 그림자조직의 목적은 조직이 해결할 수 없었던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 '그림자조직'의 운영원칙


수평·수직적 조직 그대로 구성해야

탐구·실험에 몰두하게 자율성 부여


그림자조직의 주요한 운영원칙은 세 가지로 정의된다. 첫째, 기존의 조직 및 위계를 축소한 형태이다. 둘째, 독립된 조직이면서 기존 조직과 병렬적으로 연계되어 작동한다. 셋째, 조직구성원들이 새로운 사고나 행동을 창출하고 실천하는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 조직의 축소판으로서의 그림자조직은 조직의 모든 부서에서 선발된 대표들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그림자조직은 조직 내에서 정당성, 영향력, 권한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소위 다기능(cross-functional)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기존 조직의 축소판이므로 수평적 기능뿐만 아니라 수직적인 계층도 그대로 유전되어야 한다. 즉 그림자조직은 경영진, 중간관리자, 실무자 등의 계층 구조를 기존 조직과 동일하게 구성해야 한다.

그림자조직의 독립성은, 기존 조직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별도의 시공간을 조성하려는 의도이다. 기존 조직에 산재한 제약요인들을 극복하고 순수한 탐구와 실험에 몰두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그림자조직은 적합한 인적 구성과 교육훈련을 제공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명확한 의사소통과 분석, 필요한 정보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인재로 엄선되어야 한다. 교육훈련은 그림자조직의 비전과 목적, 직면한 현안,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최소한 공통언어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기존 조직의 위계와 경계를 초월하는 차별화된 문제 해결을 추진하는 토대가 된다.
우형록 한양대 겸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