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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폭염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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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폭염 덕분에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바람의 체온이 내려갔다. 달아날 곳 없는 세상을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들볶아대던 태양의 출근이 늦어지고 퇴근은 일러진 덕택이다. 한낮의 폭염과 열대야로 설설 끓던 8월의 끝에서야 계절은 다시 섞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했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라고 어느 가수는 노래했지만 여름 풍경 앞에서 사람들의 정이 깊어지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만큼 올 여름은 혹독했다. 도시의 거리로 햇볕은 살갗을 지질 듯 달려들었고, 달궈진 건물과 차와 사람이 내뿜는 열기는 불가마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한증막 같은 플랫폼에서 숨통이 막힌 사람들의 안색은 지하철에 오른 후에야 제 빛깔을 찾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도시인들은 극장에 내걸린 영화 속 좀비처럼 몰려가고 몰려왔다. 여름은 길고 무더웠다.
그럼에도 8월의 폭염 덕분에 우리는 예전에 모르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자연의 일은 비록 무심할지언정 무용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폭염의 역사를 공부했다. 지난 3년간 지구의 온도가 매년 기록을 갈아치우며 높아져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태풍도 집중호우도 아닌 폭염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이는 기상재해임도 배웠다. 기억에서 가무러진 1994년의 불볕더위로 3,384명의 사람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복습했다. 폭염의 역사에 대한 공부는, 에어컨 없는 여름이 전쟁터로 돌변할 수 있다는 자각의 계기가 되었다.

에어컨 없이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인식에 도달한 사람들의 관심은 경제에 대한 공부로 이어졌다. 나라의 전기요금 체계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았다. 산업·상업용 전기와 달리 가정용 전기에만 징벌형 누진제가 적용된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산업 발전과 기업 성장을 위해 일반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케케묵은 제도의 낡은 취지에 공감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평성을 십분 감안했다는 제도의 불공평함에 대해 사람들은 불만을 쏟아냈다. 쏟아진 불만에 대한 관계 당국의 답변과 조처는 사람들의 현실 인식과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우연히 깨닫게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구중궁궐 안의 풍경과 그곳의 식탁에 올랐다는 음식들의 낯선 이름에서 사람들은 이 여름의 강포한 더위가 모두의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공감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은 사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사진 안의 세상은 겨울왕국만큼 낯설었다. 에어컨이 없어서, 에어컨을 켠 후 받게 될 요금 폭탄이 두려워서, 강변으로, 공원으로, 24시간 카페로 몰려가 밤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왕국의 높은 담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불만은 분노로 바뀌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시시때때로 비를 뿌리며 지나간 구름 덕이 더해져 불더위의 맹위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폭염이 아무리 사납게 굴어도 가을은 오고야 만다는 진리는 다시 증명되고 있다. 올 겨울 모진 눈보라가 아무리 살을 에고 볼을 베어도 내년에 봄은 다시 찾아와 회색빛 세상을 노랗고 푸르게 물들일 것이다. 가을과 봄이 있어 폭염과 혹한을 견디듯 우리 삶의 고난 너머에도 좋은 시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도 좋은 세상은 반드시 올 것이다. 폭염 덕분에 우리는 내년 여름을 미리 대비할 지혜를 얻게 되었다.

여름 끝에서 추석이 코앞이다. 폭염을 이겨 내신 연로한 부모님께 늦었지만 감사의 전화라도 드리면 어떨까. 물론, 우리도 고생 많았다. 우리 자신에게도 박수 보내기를 멋쩍어 말자. 밤공기를 적시며 달려오는 우렁찬 풀벌레 소리들이 반갑다. 이 반가움도 폭염 덕분일 것이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