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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이야기가 샘솟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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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이야기가 샘솟는 나라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햄버거 가게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각, 끼니를 놓친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 하나씩을 꿰차고 앉아 테이블 위의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혼자만의 식사를 의식처럼 수행하고 있었다. 해가 바뀐 지도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중순으로 접어드는 2월의 어느 날, 거리는 찬바람에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다시 한 끼의 식사를 몸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말은, 사람들의 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날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탈리아 소설가이자 시인인 체사레 파베세의 말처럼 특별할 것 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일들은 기억의 세계에서 머지않아 추방된다. 뒤로 밀려난 시간 위에 새로운 시간들이 포개지고 퇴적되면서 덩이로 버무려진 그 일들은 풍화되고 마침내 소멸되어 무의식의 바다를 표류한다. 강렬한 정서적 자극을 동반하는 순간들만이 원하든 원치 않든 기억의 벽에 박제되어 걸린다. 뇌과학에 따르면 그렇게 보존된 기억들조차 각색되고 재구성된다. 그럴진대 말과 눈빛과 표정이 사라진 공간에서 스마트폰 화면이 건네는 잡다한 정보들에 시선을 던지며 햄버거를 씹는 일이 ‘순간’으로 간직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살기 위해 먹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택한 한 끼니의 풍경은 그리하여 서글프다.
순간들은 스포츠에서 극적으로 연출된다. 올해 미국 슈퍼볼에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짜릿한 승리는 팬들을 열광시켰다. 뉴잉글랜드는 3:28의 열세를 딛고 4쿼터에서 경기를 기어이 사상 최초의 연장전으로 몰고 가더니 끝내 승부를 매조지는 터치다운을 성공시켰다. 작년 메이저리그 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는 스코어 1:3의 벼랑 끝에서 기어코 7차전까지 시리즈를 끌고 가 108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염소의 저주를 풀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만년 하위팀 레스터 시티가 132년 만에 1부 리그 챔피언이 되어 전 세계에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

스포츠의 순간이 위대한 이유는 함께 즐기고 함께 기억하기 때문이다. 극적인 승부의 감격은 경기장 안에 갇히지 않는다. 경기장 밖에서, 술집에서, 집에서 TV를 통해 사람들은 강렬한 순간이 선사하는 흥분을 공유한다. 우리도 집단적 교감의 그 벅찬 감정을 2002년의 광장에서 경험한 바 있다. 온 국민의 뇌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은 나라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세대와 세대를 넘어 경이로운 짜릿함을 다함께 만끽한 순간으로 유전될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스포츠에 열광하지만 사람의 삶이란 스포츠의 순간들처럼 동화적이지 않다. 노력은 결실 없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일쑤고 일상은 자주 먹을 때의 햄버거 맛처럼 무미건조하기 쉽다. 전파를 타는 누군가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 스토리는 동화처럼 비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조미료를 가미한 요리의 냄새를 자주 풍긴다. 동화를 닮은 이야기들은 매혹적이지만 현실과 거리가 멀어서 처량하다.

2002년 광장에 들끓던 에너지 역시 동화와 현실의 경계를 건너오지 못했다. 동화 속 마법 같은 이야기들이 경계의 이쪽에서는 잔혹하게 얼굴을 바꿨다. 세월호 이야기도, 촛불이 별빛처럼 수놓았던 광장을 잠식하며 국기에 대한 혐오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태극기 이야기도 이 시대의 잔혹동화다. 이 이야기들이 훗날 어떤 순간으로 기억될지는 다만 결말에 달렸다. 어떤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운 비극으로 남을 것이고, 또 어떤 기억은 끝내 슬픔과 분노를 딛고 행복을 되찾은 해피엔딩으로 회상될 것이다.

순간은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가꿀 때 탄생한다. 개인의 노력이 아름다운 것은 결실이 보장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오, 공동의 관심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그 외에는 달리 세상을 변화시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진다. 동화가 그렇고 영화가 그러하다. 이 시대의 이야기가 멈춤 없이 흐를 수 있기를, 좋은 이야기들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햄버거 냄새를 맡으며 기원해 본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