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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슈퍼컴의 비극...‘슬그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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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슈퍼컴의 비극...‘슬그머니’

[글로벌이코노믹 이재구 기자] #1. 지난해 2월 한국과학기술정보원(KISTI)은 국내에 있는 알 만한 슈퍼컴 관련업체들을 불러 모았다. 무려 600억원짜리 차기 슈퍼컴5호기 도입 프로젝트 설명을 위해서였다. 7월에 공개 제안요청서(RFP) 설명회 후 가진 2차례 입찰은 모두 유찰돼 해를 넘겼다. 이 사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RFP에 특정 기종만 선발될 수 있도록 했다는 의혹도 한 몫 했다. 최초의 설명회에는 사실상 다국적 기업만 참석했다. 국내 업체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이들은 참석업체들로부터 몇 다리 건너 알음알음 내용을 건네 받아야만 했다. 당초엔 발주자가 잘 아는 업체들에게만 공개된 비밀이었던 셈이다.

#2. 지난해 4월 미래부 국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10년간 1000억원을 들여 ‘한국형 슈퍼컴’을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국가과학기술심의위원회(국과심)에서는 기간내 개발 목표 성능을 높이라고 2차례나 주문하며 이를 반려했다. 5년 후면 목표 성능(1페타플롭스) 기종이 나오면 고철이 될 것이 뻔했기에. 하지만 미래부는 국과심 몰래 이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이를 국과심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기존 SW사업 내 ‘계속 사업’중 하나로 끼워 넣었다. 미래부 담당 과장은 당초 국장이 발표한 ‘한국형 슈퍼컴 개발’ 계획에 대해 “SW인력 확산에 의미가 있는 사업”이라며 사업 의미를 축소했다. 정부의 향후 5년간 프로젝트 예산 지원액도 당초의 절반인 250억원이 됐다. 한국형 슈퍼컴 개발 계획은 이렇게 왜곡됐다. 기막힌 것은 이미 순국산 슈퍼컴 업체가 미래부가 개발하려는 목료 기술을 상품화했고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도 외면당했다는 점이다. 이 제품 기술력은 세계적 슈퍼컴기구 ‘톱500’에서도 소개됐고 미국방부와 프랑스 최대 이통사가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3. 지난해 7월 30억원짜리 판교이노베이션허브 슈퍼컴 구축 계획이 나왔다. 이 프로젝트는 슈퍼컴퓨터연구조합 주관으로 시작됐다. 판교의 벤처들이 이를 사용해 큰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시뮬레이션도 해서 혜택을 보게 하자는 취지였다. 여러 번의 토론 끝에 큰 그림이 완성된 지난 10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향이 바뀌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주관사가 정보통신기술협회(TTA)로 바뀌었다. 향후 운영방식과 아이디어까지 나온 마당이었다. 그간 논의되던 국산 슈퍼컴 도입 계획도 외산으로 바뀌는 분위기가 됐다. KISTI와 미래부 관계자가 회의에 참석한 이후 나온 변화였다.

#4. 지난 1년간 굵직굵직한 슈퍼컴 관련 이슈들을 들춰보면 공통적으로 ‘슬그머니’라는 부사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사전적 의미인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며시’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들 프로젝트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거나 현재 진행형이다. 또다시 ‘슬그머니’ 이뤄질 것이란 우려감을 사고 있다. 슈퍼컴은 4차산업혁명의 중요한 축이기도 하다. 하지만 슈퍼컴을 둘러싼 ‘슬그머니’ 관행은 여전히 투명치 못한 과학 행정의 부끄러운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기정사실화 한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4차산업혁명의 적임자인지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보다 먼저 할 일은 ‘슬그머니’ 병(病) 치료일 것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의 본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로라면 과기행정 책임자들 역시 그리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재구 기자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