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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35)] 다라국의 형성과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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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35)] 다라국의 형성과 발전과정

글로벌이코노믹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기다'를 연재합니다.

한류문화인진흥재단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경상 작가는 1990년부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세계 100여곳을 방문해 지난 25년 간 세계문화유산을 카메라에 담아왔으며, 최근에는 한민족의 시원을 밝히기 위해 한·중·일에 흩어져 있는 단군의 흔적을 답사했습니다. 앞서 연재한 '고조선 시대 단군 이야기'에 이어 '한반도 삼한시대 이야기'를 김경상 작가에 의해 생생한 유적과 유물 사진으로 만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옥전 4호 고분에서 출토된 원통모양 그릇받침과 짧은목항아리, 합천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옥전 4호 고분에서 출토된 원통모양 그릇받침과 짧은목항아리, 합천박물관


옥전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다라국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추적해보자.

400년을 전후해 합천의 옥전지역에는 갑옷과 투구(甲冑)를 비롯한 무기와 말갖춤새, 각종 장신구 등의 금속유물이 갑자기 등장했다. 이러한 금속유물의 근원은 고구려나 선비족인 모용씨의 연나라 등 중국 동북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북방의 갑주문화는 4세기대 동아시아의 정세변동에 따라 당시 영남의 선진지역이었던 김해지역에 가장 먼저 전달되었고, 여기에서 약간 개량된 자료들이 5세기 이후 서부경남의 각 지역에 파급되었음이 최근의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또 이 지역의 토기 모양이나 무덤 축조 방식을 보면 김해·부산지역과 동일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앞 시기에 비해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부장된 유물 역시 비교할 수 없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을 볼 때 이 시기에 ‘다라국’이 성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다라국 최초의 지배자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무덤 축조방식이나 토기, 금속유물의 원류가 모두 김해지역이라면, 결국 다라국의 성립에는 김해지역에 있던 금관가야(가락국)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갑자기 합천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던 것일까? 이 점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南征) 사실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지원요청에 의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을 침공했다. 임나가라는 곧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이며, 고구려 대군의 침공을 받은 금관가야는 거의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그 결과 금관가야의 왕릉이었던 대성동고분군에 더 이상의 왕릉이 조성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와해된 금관가야의 지배집단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낙동강 물길을 따라 서부경남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합천지역에도 이 집단의 일부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다라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