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를 타면 서울에서 익산까지 1시간 6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반나절 생활권인 것이다. 버스를 타고 전주로 들어가는 길에 눈에 띄는 ‘호남제일문’이란 현판은 그 옛날 만주를 호령했던 대륙적 호탕함이 느껴졌다. 유라시아를 향해 해양에서 보면 ‘대륙제일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일 때문만이 아니라 여행의 여정으로도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201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복지 제도와 관료주의를 비판한 영화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이 있다. 성실하게 살아온 늙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 수당이 끊기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 간다. 우연히 만난 젊은 엄마 케이티는 성매매를 하면서까지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블레이크는 상담사에게 “인간은 자존감을 잃어버리면 다 잃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명단에서 빼달라고 말한다.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케이티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겨주고 숨을 거둔다. 케이티는 그의 유언을 담담하게 읽는다. “나는 게으른 사람도 사기꾼도 아닙니다.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건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매일 눈 뜨자마자 사건들과 마주한다. 사건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3월1일, 광화문 광장에서 극단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등을 맞대고 마주 했다. 지금 저 곳에 양극단의 모습으로 서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 왜 일까? 기실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정치적 사태에 대한 입장 차이라고 할 것이다.
알겠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으로 다시 보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의 기준으로 보자는 것이다. 어느 한쪽을 편들 생각은 없다. 다만 재판정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이고 거리에서 유혈 사태를 언급하고 재판관의 집주소를 공개하며 위협하는 몰염치와 몰상식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지향하는 정치적인 입장 역시 용납되기 어렵다. 다 떠나서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현장에 있고 현장엔 사람이 있다. 사람으로 판단하라. 당신은, 나는, 정말 꽃보다 아름다운가.
글·경기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정보경영학박사/ 생각의 돌파력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