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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45)] 고자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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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45)] 고자국의 멸망

글로벌이코노믹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기다'를 연재합니다.

한류문화인진흥재단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경상 작가는 1990년부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세계 100여곳을 방문해 지난 25년 간 세계문화유산을 카메라에 담아왔으며, 최근에는 한민족의 시원을 밝히기 위해 한·중·일에 흩어져 있는 단군의 흔적을 답사했습니다. 앞서 연재한 '고조선 시대 단군 이야기'에 이어 '한반도 삼한시대 이야기'를 김경상 작가에 의해 생생한 유적과 유물 사진으로 만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햅엽, 고성박물관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햅엽, 고성박물관


고자국(古自國)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세기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중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은 국읍과 읍락을 기본 구성으로 하며 한반도 남부지역의 일반적 상황을 고려할 때 기원 전후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자국은 현재 고성군과 도서지역 범위이며 중심이 되는 국읍이 인근 읍락들에 대해 구심력을 가진 상태였을 것이나 안야국이나 구야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소국이었을 것이다.

고자국의 권역은 좁게는 지금의 고성군의 남부지역, 넓게는 고성・통영・사천・삼천포・남해・거제 등을 범위로 하였을 것이다.

3세기초에 일어난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에서는 고자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이 해안지역이라는 개방된 지리적 조건에 있으면서도 직접 교역을 못하고 구야국을 통해서 중국 왜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일으켰던 것이고, 전쟁의 중심세력은 구야국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내륙을 통한 제 소국의 장악이 가능했던 안야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들어 중국 군현의 축출과 신라 낙동강 하구 교역권 장악으로 인해 고자국의 대외 교역 상황은 변하게 된다. 전남지역을 도륙한 백제가 서남해안을 확보하고 이어 탁순을 통해 가야지역의 유력 소국들과 교역을 트게 되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가락 7국 중 고자국이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아 고자국은 여전히 가야의 주요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자국의 백제지역과의 주요 교역은 탁순을 경유했을 것이나 해로가 항상 열려 있었고 대왜교역(對倭交易)의 경우 지리적으로 유리한 거제와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탁순에 종속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 이후에의 정치적 결집력은 그다지 강고하지 못하고 단위집단으로 구성돼 있던 고자국의 각 읍락이 중심지로부터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한계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고자국은 가야연맹의 일원으로 안라가야(安羅加耶)가 주도하는 회의에 계속 참석하면서 가야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550년경 백제의 강한 영향권 하에 놓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형세가 신라에 완전히 기울어지고 고자국의 지배계층은 금관가야의 지배층처럼 신라에 투항하거나 외국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554년에서 562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