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그리스도교가 각 수도원을 중심으로 인생만사의 중심에 있던 신정시대였다. 그들은 생활·정치와 연계되면서 인간의 죽음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다. 십자군전쟁(1092년∼1272년) 배경에는 610년 마호메트의 이슬람 성장이 있었지만, 또 다른 배경에는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로 교회의 재산탐닉과 부정부패에 의한 세속화에 있었다.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특히, 전쟁자금이 부족하면서 시장세, 통행세, 관세 등과 제후들은 후추와 향신료를 구입하고 세금을 뜯기 위해 상업도시를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상인들에게 ‘자유도시’ 자치권을 주게 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케 된다. 더 큰 문제는 1346년 이후 흑사병과 기근, 전쟁으로 유럽인구 절반가량이 사망하면서 하나님에게 진노를 달래는 채찍질고행과 유태인학살의 만행까지 저지르게 된다.
1483년 구리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가 수도사에서 박사학위와 교수까지의 사건은 중세의 사회현상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다양한 사회적 체험과 다양한 시련은 그 시대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란 민주주의 가치체제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다. 인간들은 어떠한 시대적인 외부억압이나 불평등에 의한 구속과 착취들이 있을 때는 자유의 한계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대중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의 한계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루터는 1520년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von eines Christenmenschen)’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고 하는 대명제를 만들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고 다음 주는 부활주일이다. 또한 지난 3월 22일은 부산운동권의 대부였던 최성묵 목사가 소천한 25주년이었다. 최 목사는 서울문리대,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목회자와 학자로 평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고통 받는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그는 서울에서 KCM총무 등과 부산 USIS학생과장과 YMCA총무, 중부교회 담임목사를 거치면서 보수권력과 맞섰다. 송기인•오수영 신부 등과 정의구현기독자회를 조직하고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지부, 부산도시산업선교회, 부산생명의 전화, 장애자자립센터를 창립하면서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져 갔다. 필자는 지난시절, 최목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부산 대학-Y 초대회장과 결혼 주례와 중부교회 집사 등을 거쳤다. 그러나 그가 남기신 ‘인간해방과 진리’를 위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시대적 부활정신과 맞물려 제자로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임실근 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