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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사라진 ‘킹메이커’] 김종필, 한국 정치사 큰 ‘족적’ 남기고 떠나...영원한 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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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사라진 ‘킹메이커’] 김종필, 한국 정치사 큰 ‘족적’ 남기고 떠나...영원한 2인자

김종필 전 총리가 별세하면서 3김 시대가 저물었다.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가 별세하면서 3김 시대가 저물었다.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킹메이커’,‘정치풍운아’,‘영원한 2인자’,‘최다선 국회의원’ 등...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더불어 '3김 시대'를 이끈 주역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에게 붙어진 수식어다. 김 전 국무총리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영욕의 세월을 겪으면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23일 오전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3김(金) 시대를 이끈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YS(문민정부)·DJ(국민의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킹메이커‘(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라 불릴 만큼 정치계의 실력자였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 전 총리의 지지를 기반으로 대권에 성공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김 전 총리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대권과 인연이 없어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그야말로 정치 풍운아의 삶이었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산리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5년제인 공주중학교를 4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를 수료했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부를 3년간 수료한 뒤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했다. 대위 시절인 1952년 2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소개로 조카인 박영옥 여사와 결혼, 박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이미지 확대보기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

박 전 대통령과 1961년 5·16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면서 현역으로 복귀, ‘국가재건최고위원’을 겸임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당시 시국정화단 등을 개편해 ‘중앙정보부’(현,국가정보원)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에 임명되면서 군부 제2의 실력자가 된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10월 제5대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 해 11월 총선 때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어 공화당 의장에 선출된다. 박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의 11대와 DJ(국민의정부)정권 31대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냈다.

신군부(전두환 정권)가 등장한 뒤에는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권을 떠나야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 해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신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고배를 마셨다.

김 전 총리는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거대 집권 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에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하지만 민자당 내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려는 YS와 갈등을 빚어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YS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줘야 했다.

YS 정부 시절인 1995년 당내 민주계에 의해 '2선 후퇴'를 요구받으면서 탈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자신이 창당한 네 번째 당이었다. 자민련은 1995년 민선으로 전환된 지방선거에서 대전·충남·충북, 강원지사까지 당선시키면서 중부지역의 맹주로 떠올랐다.

자민련은 다음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지역구 41석과 전국구 9석 등 총 50석을 확보, 민자당,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이은 제3당이 됐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념적으로 거리를 있던 DJ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DJP(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연합’을 깜짝 발표했다.

DJP연합을 통해 국무총리를 맡게 된 그는 실세 총리로 2인자 역할을 유지했다. 2001년 내각제 개헌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DJ 정부의 햇볕정책을 둘러싼 지속된 갈등 끝에 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한다. 이를 계기로 DJP연합은 붕괴됐다.

자민련은 2004년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탄핵 직후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는 자민련의 몰락뿐 아니라 김 전 총리의 정계은퇴로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휠체어에 의존해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해 왔다. 2013년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 창립총회를 국회에서 열었고, 2016년에는 43년의 정치인생을 펴낸 책 '김종필 증언록'을 출간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9선 국회의원, 두 차례의 국무총리 역임, 4개 정당 총재라는 ‘정치9단’ 경력을 지닌 정치인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특히 피아노 연주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스포츠와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인간 김종필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졌다.


김재영 기자 jaykim@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