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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8)] 중세구두 제조공, 태권 노란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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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8)] 중세구두 제조공, 태권 노란띠

6월13일, 투르쿠 관광과 무인호텔에서의 하룻밤

6월13일 아침, 헬싱키 에로타얀푸이스토 호스텔을 나서 열차를 타고 서쪽 끝으로 이동, 투르쿠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구입해온 유레일패스는 지난 토요일 헬싱키 중앙역에서 개시했고, 기차표도 예약해놨다.
투르쿠는 스웨덴 지배 시절부터 핀란드의 수도가 된 고도(古都)다. 어제 창도 200주년을 기념한 헬싱키 이전의 수도였다. 오래된 만큼 고풍스러운 장소들이 많아 색다른 매력이 풍겨나오는 도시다. 헬싱키보다 날씨도 훨씬 좋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길쭉한 모양으로 도시가 형성됐다. 사람들도 훨씬 친절하다는게 느껴지는데, 헬싱키 시민들보다 영어실력은 떨어진다. 스웨덴 영향권이라 ‘오보’라는 스웨덴 지명까지 있고, 전반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스웨덴 분위기가 있다.

햇빛이 짱짱해 얼굴이 빨갛게 익을 정도로 덥다. 공기가 좋은 만큼 얼굴이 더 타는 건 감수해야한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는데 버스 노선도 제한적이라 웬만한 거리는 다 걸어야하는 게 고역이긴 하다. 길을 물어보면 다들 걸을만한 거리라고 하는 게 1㎞ 정도니 말 다했다. 여독과 짐무게에 치인 몸으로 하루에 몇 ㎞씩 이동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기차 안의 냉방시설에 몸이 추워져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일명 ‘천사 식당’으로 불리는 엥킬라리빈톨라(Enkelinavintola)를 찾아갔다. 점심메뉴에 토마토수프가 있어서 시켰는데, 전채로 샐러드가 나오고 빵과 함께 수프를 주고, 식후에 커피까지 준다. 수프는 내 입맛에는 좀 짠 듯했지만 호박, 파프리카, 바질 등의 재료가 정말 신선했다. 10 유로면 현지 물가로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 같다. 자주 먹는 대신 한 번에 먹는 양이 남들보다 적은 나로서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 주인이 정말 진심으로 세심하게 서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게 안은 방마다 다른 그림들과 장식들로 그득한데, 구경하는 재미가 웬만한 갤러리 저리가라다. 헬싱키에 거주하는 화가 툴라 일베스(Tuula Ilves)가 인테리어도 맡아줬다고 한다. 나는 툴라 일베스의 그림이 가득 걸려있는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야수파의 아류 같은 그림이다.

◇18세기로 돌아가 보낸 화창한 오후

투르쿠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루노스타린메키 야외 수공예박물관(Luostarinmäki Handicrafts Museum, 핀란드어 Luostarinmäen käsityöläismuseo)이었다. 관광안내소를 거쳐 시를 가로지르는 강 위의 다리를 건너 언덕을 한참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200여년 된 오래된 오두막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곳인데, 20여채의 목조가옥들이 뿜어내는 낡은 목재의 향긋한 냄새, 풀과 나무, 꽃으로 그득한 자연의 싱그러운 냄새에 취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오후를 이곳에서 다 보냈다. 작은 나무집 하나하나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다가,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서 쉬다가 하는데 흔히 하는 표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안내소에서 받은 설명서를 읽어보니 1827년 투르쿠에 대형화재가 있어 도시의 3분의 2가 소실됐지만 이곳은 다행히 남아있게 됐고 1785년부터 1808년 사이에 지어진 이 집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됐다는 곳이다. 1930년대부터 논의를 거쳐 1940년 6월29일 일반대중에게 공개됐다. 돌아다니다 보니 TV까지 설치돼있는 현대적인 방이 있다. 물어보니 1982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여성 마스터(번역하자면 ‘달인’ 정도가 될까)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핀란드 디자인의 본거지로 불리며 예술가들이 집단체제로 작업하는 피스카스 마을도 이렇게 수공업업자들이 모여 살던 길드 시스템의 전통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핀란드의 주요 디자인인 수공예의 원류다. 빵집, 구두방부터 바구니, 통, 양복, 그릇을 만드는 이들의 작업실 겸 거주지다. 담배와 파이프, 바이올린, 시계, 제작, 책제본 등 보다 전문적인 일들을 하던 이들이 살던 곳들도 있는데, 제작 도구들을 내부에 전시해놨다. 모두 손으로 하던 시절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시절의 우체국과 담배가게들도 있는데, 곳곳에 18세기 전통의상을 입은 직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촬영에 즐겁게들 응해준다.


무엇보다 핀란드 전통가옥과 주거양식을 체험하는 것이 즐겁다. 핀란드인들의 키는 다른 백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작은데 당시에는 더 작았을 터이니 집의 천장이 낮아 지나다니다가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나뭇가지를 잇대어 만든 빗물받이가 특이하다. 아담한 집들에서 핀란드의 추운 겨울을 엿볼 수가 있었다. 방마다 굉장히 큰 벽난로들이 자리해있는데, 어떤 방은 이 난로가 거의 6분의 1을 차지할 정도다. 외벽도 두껍고 곳곳에 눈이 많이 오면 신발에 덧대 신을 수 있는 나무와 쇠로 만든 도구와 썰매 같은 것들도 걸려있다.

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장인들이 각종 전통방식을 시연해 보이는데 내가 방문한 수요일에는 구두제조공이 있었다. 영민해 보이는 눈을 지닌 여인의 이름은 하나. 전통복장을 입은 채 손으로 일일이 바느질을 해서 어린이용 구두를 만들고 있다. 영어도 잘해서 “여기선 재봉틀도 사용하는 좀 더 현대적 방식이지만 반대쪽 집으로 가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기구들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다”고 알려준다. 본래 구두 디자이너였다는 하나는 전통 구두제조 방식에 매료돼 나이 많은 마스터에게 이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중세 방식으로 가죽신을 만들고도 있다고 보여주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잡아주기도 한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투르쿠 시내에 있는 도장에서 태권도 노란띠를 땄다면서 굉장히 반가워한다. 8월에는 태권도 관련 행사도 있다고 한다. 한국인 사범이 있느냐고 물으니 아마 80년대에는 있었을텐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 시절 태권도 사범들이 전세계로 진출해 민간외교사절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하는데, 핀란드에까지 그 영향이 남아있다.

하나는 또 “일본인들이 ‘하나’가 일본어로는 ‘코’라는 뜻이라고 가르쳐주던데 한국어로는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본다. 숫자 1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니 갑자기 “하나, 둘, 셋”하면서 한국어 숫자를 읊어 보인다. 태권도 구령 붙이던 기억이 났나보다. 아무래도 액선트가 다르니 별로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투다.

나머지 시간은 아보아 베투스(Aboa Vetus, 라틴어로 ‘구 투르쿠’를 의미한다고 한다)를 구경하며 보냈다. ‘살아있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투르쿠 대화재로 땅밑에 묻혀버린 곳을 뒤늦게 발굴하게 된 중세 투르쿠 유적이다.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해놓았는데 이를 통해 15세기 생활상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위에는 한 때 담배공장과 오노나 스파가 지어지기도 했는데 20세기 초 1390~1450년대에 돌로 만들어진 이들 건축물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그 흔적이 지상층(여기서는 0층이나 마찬가지)에 있는 오울라 카페(Aula, 라틴어로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로 그대로 이어지고 1, 2층에는 현대미술관인 아르스 노바(Ars Nova)가 위치해있다.

입구에서 표를 받아 들어가니 확실히 핀란드 예술의 핵심은 ‘체험’이다. 중간중간 계단을 설치해놓아 돌로 만들어진 집과 성당, 우물 등의 유적들을 직접 걸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여전히 발굴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중세시대 집을 재현해놓은 소형 모형에 목각인형을 설치해놓고 어린이들이 직접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해놓은 곳도 재밌다.

관람객은 나 혼자뿐, 장소가 꽤나 넓어서 돌아다니다 보니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춥고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갇히는 것 아닌가 일순 두려움이 드는데 마침 3명의 중년 여인이 보인다. 너무 넓어서 길을 잃었다고 하니 웃으면서들 출구를 가르쳐준다.

◇알바 알토가 설계한 무인호텔에서의 하룻밤

기차역으로 다시 가 라커에서 짐을 찾아 호텔로 왔다. 이곳에서 숙소는 투르쿠 역에서 가까운 오메나 호텔리로 잡았다. 이동 중에는 숙소가 역에서 가까운 것이 중요하다. 이번 일정의 모든 숙소를 가격과 함께 역과의 거리를 고려해서 잡았다.

오메나 호텔리의 숙박비는 1박에 50 유로(약 7만3000원) 정도로 북유럽 물가에 비해서 혼자 쓰는 호텔방으로는 굉장히 싼 가격에 속한다.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무인호텔이기에 인건비를 대폭 아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북유럽에서는 사람 손이 닿으면 무조건 가격이 뛴다.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인 듯하다. 같은 기차표도 기계로 구입하는 것보다 차장이나 창구직원에게 구입하면 가격이 올라간다)

인터넷으로면 예약하면 얼마 뒤 카드지불승인 메시지와 함께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e-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날아온다. 체크인은 당일 오후 4시부터 가능한데 낮 12시 정도에 역시 방번호를 메일과 문자로 알려준다. 직원이 없기에 체크인 이전이나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길 수 없는 게 단점이지만,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만큼 메일 문의를 하면 답변이 놀랄 만큼 빨리 온다. 예약확인서를 들고 가면 근처 카페에서 6.5 유로를 내고 아침을 먹을 수 있다. 왜 메일로 알려준 카페 이름과 홈페이지에 안내된 카페 이름이 다르냐고 메일을 보냈더니 몇 시간도 안 돼 최근 카페 상호명이 바뀐 것이라고 미안하다는 답장이 오는 식이다.

오메나 호텔리는 핀란드어로 사과 호텔이라는 뜻으로 사과처럼 빨간색이 상징색이다. 하얀 건물의 빨간색 간판이 도드라진다. 핀란드 여러 도시에 버스역이나 기차역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는데 투르쿠에 있는 곳은 핀란드 국민건축가이자 가구디자이너인 알바 알토가 설계한 곳이다. 핀란드에서 알토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엄청 성실해 핀란드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용디자인 강국인 만큼 보는 것마다 깔끔하면서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여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찰 정도다. 내가 묵는 304호는 2평도 안되는 방에 4명까지 묵을 수 있도록 상당히 기능적으로 꾸며져 있다. 2명이 잘 수 있는 침대 말고도 펼쳐서 쓸수 있 는 소파베드가 있다.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분리대를 옷장으로 꾸며놓았고 속이 들여다보이게 유리문을 해달은 소형냉장고도 마무리가 깔끔하다. 전자레인지부터 전기수건건조대까지 실리적으로 필요한 건 다 있다. 창이 없어 좀 답답한 듯하지만 환기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방음이 완벽하다. 일주일만에 홀로 방을 쓰니 조용한 데다가 내 맘대로 짐을 펼쳐놓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연재물 쓰는데 훨씬 집중도 잘된다.

내일은 무민월드를 방문하기로 한 날, 체크아웃하고 집을 역 라커에 보관한 다음 다시 마켓광장으로 이동해 무민월드가 위치한 난탈리행 버스를 타고 갔다가 돌아와 다시 역으로 가 산타마을이 있는 로바니에미롤 향하는 밤차를 탈 예정이다. 시간에 맞춰 이동할 수 있도록 루트를 미리 점검하고 짜고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엄청 복잡하다. 이동할 버스와 열차를 놓치지 않은 것이 정말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려면 무척 피곤한데도 막상 나돌아다니면 새로운 것을 보는 즐거움에 마구 기운이 샘솟는 듯하다. 이게 여행의 묘미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