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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5)] 월경, 노르웨이 꽃미남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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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5)] 월경, 노르웨이 꽃미남 만나다

6월20일, 이나리에서 노르웨이 카라쇼크로


6월19일 본격적으로 핀란드 사미문화를 보여주는 사요스(Sajos)와 시다(Sidda)를 위시로 이나리 중심가를 샅샅이 다 둘러보고 나니 20일 오후 5시 출발하는 노르웨이 카라쇼크행 버스를 탈 때까지 할 일이 없다. 안 그래도 매일 걷거나 뛰고 있는데 하이킹은 너무 힘들고 순록농장 견학이나 크루즈밖에 할 일이 없다. 크루즈는 라플란드에서 가장 큰 호수인 아니리야르비를 두 시간 정도 도는 것으로 중간에 사미족 유적이 있는 섬에도 들른다고 한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춥고 계속 추적추적 비가 온다. 무리해서 비싼 돈을 들여 비를 맞으며 순록농장을 가거나(순록농장까지 데려가고 오는 것까지 포함해 1인 80 유로 안팎이다. 단 한 명만 예약하려 하면 돈을 더 받을 수도 있단다) 배멀미도 곧잘 하는데 배를 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제 일정의 8분의 1정도 소화했는데 앞일을 생각해 무리할 순 없다. 게다가 원고가 밀렸으니, 이걸 다 해결하고 이나리를 뜨려고 체크아웃 후에도 호텔 레스토랑에서 글을 썼다.

매일매일 쓸 일은 많은데 관광하고 취재하고 다녀와서 사진정리하고 충전할 것들 충전하고 씻고 어쩌고 하다보니 매일같이 연재하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이 밀린다. 어쨌든 마감은 마감이다. 천상 기자질이 몸에 배 마감에 목숨을 건다.

이나리 호텔 로비는 이곳에 금광 바람(골드러시)이 불었을 때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사진과 사미족을 그린 키치적 그림으로 장식돼있다. 동네 양아치들의 모임장소이기도 한가보다. 담배 냄새에 절은 골초 아저씨들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뭐라뭐라 말을 시키는데 핀란드어인지 사미족 언어인지 나로서는 구분할 도리가 없다. 로비에 설치된 오락기를 가지고 놀던 낮술 드신 중년 ‘놈팽이’가 와서 영어로 말을 건다.

대뜸 “후 아 유?”란다. 어쩌라고? 이곳 로비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뭣 좀 질문하고 싶어도 너무들 바빠서, 뭣 좀 취재가 될 게 있을까 해서 “혹시 사미족이시오? 여기서는 뭐 하시오?” 했더니 자긴 그냥 템페레에서 와서 여기서 이러고 있단다. 그러더니 곧 내 액선트를 못 알아듣겠단다. 당신 영어실력이 딸리는 거겠지. 확실히 세계 어딜 가나 여자들의 언어능력이 더 뛰어나고 외국어를 잘하는 것 같다. 내 영어실력도 컨디션 따라 좀 오락가락하지만 여자들은 어찌 알아듣고 대충 대화가 된다. 근데 대개 남자들은 못 알아듣는건지, 알아듣기 위해 신경을 안 쓰는건지, 하여간 그들과의 대화는 되도록이면 안 하기로 했다. 피치 못하게 상대해야할 직원이 남자라면 아주 크고 정확한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줘야 한다.

날씨 때문에 소화도 안 되고 비는 끊임없이 흩뿌리고 시끄러운 가운데 연재물 쓰느라 골치도 아프고 역한 담배 냄새에 더 머리가 깨질듯 아파오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작은 동네에 슈퍼마켓이 많은 이유

처음 이나리에 왔을 때 이 작은 동네에 웬 슈퍼마켓이 이리 많나 하다가, 여행작가 유진선씨의 말이 떠올랐다. (유럽여행 커뮤니티인 네이버 유랑 카페에서 ‘티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씨의 북유럽에 대한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한국에서 북유럽 여행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기에, 그가 준 사전정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여기와서 엄청 헤매지 않았을까)

세계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노르웨이로 넘어 가기 전 핀란드에서 장을 많이들 봐간다는 것이다. 나도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한가득 장을 봤다. 확실히 다른 지역 슈퍼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인스턴트와 장기보관용 식품들이 많다. 심지어 물을 부으면 고기맛이 나는 무슨 군용식품같은 것까지 비싼 가격에 팔고 있다. 핀란드에서 마지막이니 핀란드 자작나무에서 추출했다는 국내 광고로 유명한 자일리톨껌(‘양키’를 뜻하는 옌키 브랜드)도 사고 무민캐릭터 포장지의 초콜릿(현지 유명브랜드 파제르 제품)도 샀다. 베리류가 많다지만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베리 수프까지 판다. 맛이 궁금해서 샀다. 이걸 다 이고 가는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샀다. 여긴 껌값도 ‘껌값’이 아니다. 노르웨이 물가는 얼마나 비쌀지 상상이 안 간다.

이틀전 내렸던 시각에 맞춰 다시 하나뿐인 라인인 버스를 타고 드디어 노르웨이로 향했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데 버스기사 양반은 참 무뚝뚝하다. 북극권 여자들의 친절함에 반한만큼 핀란드 남자들의 불친절함에 질려있었지만, 이 양반은 좀 이해를 해주려고는 한다. 북극권 버스기사들은 매우 바쁘다. 시간 맞춰 버스운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지대가 높아지는지 비오는 언덕길을 100㎞로 밟아 달린다. 그러면서 이나리 ‘오또’ 옆에 버스를 세워놓고 현금을 찾는 개인적인 일도 보고 역마다 내려 무슨 물건도 전달하고 이런저런 일들도 하느라 엄청 부산스럽다.

버스는 핀란드에서 마지막으로 카리가스니에미(Karigasniemi)에 정차한다. 이곳 슈퍼마켓 앞에서 오후 6시25분부터 20여분 넘게 대기하는데 아마 장을 봐가라는 의미인 듯싶다. 나도 세곳이나 되는 슈퍼중 두곳에 들러 남은 동전으로 진공포장된 우유와 초콜릿을 더 샀다. 계산대 여직원에게 “노르웨이로 가는 여행객들이 음식 사가느라 여기 슈퍼마켓이 많나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확인해준다. 그래도 40 유로 정도 지폐가 남았다. 숫자에 약한지라 돈계산에도 머리가 복잡복잡하다. 노르웨이로 넘어가면 현지 통화인 크로네를 써야하는데 남은 유로는 처치곤란이다. 버스기사에게 카라쇼크에서 호닝스보그로 가는 버스도 유로를 받는냐고 물어보니, 받긴 받는데 50 유로가 넘는 가격이란다.

6시40분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마자 버스기사가 길 위에서 “이제부터는 노르웨이는 노르웨이 시간으로 한 시간 앞당겨진다”고 안내를 해준다. 그래서 다시 시간은 오후 5시40분이 됐다.


대륙으로 가는 길은 북한에게 막혀있는 반도인지라 인위적 섬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인 한국인에서 버스로 국경을 넘는 것은 신기하다. 뭔가 표지판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냥 쭉 이어진 도로를 그냥 갈 뿐이다. 풍경이 달라보이는 것은 더 북극에 가까워졌기 때문일테다. 핀란드에서는 계속 쭉쭉 곧은 숲뿐이었는데, 여기는 붉은 흙들도 드러나고 나무의 빛깔도 한층 짙어 보인다. 가장 구별되는 것은 가옥의 스타일이다. 핀란드에서는 그저 벽돌빛으로 칠한 집들만 보였는데, 지붕의 스타일도 다르고 코발트블루, 미색, 주황색 등 다양하게 외벽들을 칠한 집들이 훨씬 화려하고 세련돼 보인다. 국경에 선을 그어놓은 것도 아니고 핀란드 바로 북서쪽일 뿐인데도 풍경이 이리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다. 새로운 곳을 만나니 마음이 다시 설레어온다.

스마트폰이 시차변화를 어떻게 적용할지도 궁금했는데 카라쇼크 중심가에 다다르니 그제서야 자동 변화가 된다. 외교부가 국경을 넘을 때마다 보내주는 ‘위급상황시 영사콜센터로 전화하십시오’라는 문자메시지도 수신된다.

◇노르웨이에서 처음 만난 꽃미남 총각

불친절한 버스기사는 나를 카라쇼크 리카호텔에 내려놓고 쌩하니 가버렸다. 뭐 장거리버스를 운전하는 그가 이 동네를 세세히 알 리 없다. 다행히 여기는 비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온만큼 더 추워지고 마음까지 쌀쌀해진다. 할 수 없이 리카호텔에 길을 물어보러 들어서는데, 리셉션을 지키고 있는 밝은 금발의 꽃미남 총각의 미소에 노르웨이가 좋아질 것 같은 기분이 솟구쳐 올랐다.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며 지도에 표시를 해 길안내를 해주는지. 키가 좀 작은 것이 단점이랄까, 미남 얼굴 들여다보며 감상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호텔 문밖에 세워놓은 캐리어가 걱정돼 재빨리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좋은 시간 가지라”며 소리까지 쳐주신다. (한국어로 번역하니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하다. 숙박업소 직원들이 잘 쓰는 말이긴 한데)

로바니에미에서 가이드를 맡아줬던 김미경씨로부터 소극적인 핀란드 남자들과 비교해 노르웨이 남자들의 적극성에 대해서는 듣고 왔지만, 이 정도의 친절은 베풀어줘야 여행할 맛이 나는 거 아닌가. 근데 숙소를 잘못 잡았다. 엄청난 노르웨이 물가에도 불구하고 싸게 묵을 수 있는 유스호스텔은 버스역에서 좀 먼 듯싶어 ‘흰 순록 모텔(Den Hvite Rein Motel)’이라는 게스트하우스를 1박 예약했는데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게 죽을 맛이다. 카라쇼크 지도를 보니 리카호텔에서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흰 순록’이라는 예쁜 이름에 끌린 것도 있었지만, 엇비슷한 가격에 고생을 더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억울하다.

한국에서는 북유럽 쪽, 특히 북극권 쪽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찾기는 힘들다. 여기까지 올라와본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숙소를 예약할 때도 구글지도를 검색해 어림짐작으로 무조건 역에서 가까운 쪽, 가격이 적당한 곳을 골랐다. 제한된 정보로 숙소를 정하고 막상 와보니 이런저런 조건에서 더 나은 숙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나리에서도 장거리버스가 호텔 문앞에 바로 서고 유스호스텔 가맹점이기도 한 이나리 호텔에 묵었는데, 방도 엄청 작은데다가 직원들은 친절하긴 한데 눈코뜰새없이 바빠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보기 힘들다. 보아하니 주인이 성공한 사미족인 것 같은데 주인부터 엄청나게 부지런을 떠는 것 같다. 내가 버스에 오르려하자 냉큼 나와서 짐을 올려줄 정도로 세세하고 배려심이 큰 사람이기는 했다.

여기 와서 보니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게스트하우스 ‘빌라 란카’도 바로 길 건너에 있다. 말을 태워 관광을 시켜주는 말 농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나린 쿨타호비 호텔에서 식당뿐만 아니라 리셉션에서 별로 좋은 대접을 못받았던지라 망설이다가 카라쇼크행 버스시간이 남아서 잠깐 들러보았다. 통통한 몸매에 인상좋은 사미족 여주인이 무척 친절하다. 방좀 구경시켜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비가 와서 숙소에 남아있는 듯한 동양인이 포함된 손님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얼른 열쇠를 들고 나온다.

사투 나투넨(Satu Natunen)이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예술적 재능이 무척 뛰어나서 집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과 장식물, 공예품들을 모두 직접 만들었단다. 자신이 그린 그림 앞에서 포즈를 잡아주기도 했다. 방이 다섯 개밖에 되지 않아 보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다음엔 꼭 여기서 머무르고 싶다고 하니 넉넉한 미소로 답한다. 그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다면 사미족 생활에 대한 질문도 하고 보다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마냥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