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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 80일 (20)] 다른 색 없다, 온통 블루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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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 80일 (20)] 다른 색 없다, 온통 블루 블루

6월24일, 세계 최북단 도시 함메르페스트

함메르페스트와 사랑에 빠진 것은 날씨 덕분일 터이다. 영상 15도에 달하는 따뜻한 기온, 짙푸른 하늘빛과 그와 호응한 바닷빛.
버스가 도시 중심가로 들어서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경사가 심한 뾰족 지붕에 삼각형 창이 나있는 하얀 교회였다. 내일 일요일을 맞아 꼭 예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란한 햇빛 때문인지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북극권에서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건 한참만이다. 그것도 더할나위 없이 최고로 쾌청한 날씨다.

아무래도 원고 마감을 지켜야하기에 기분 내키는대로 뛰쳐나갈 수도 없고 글 쓸 정신과 기운을 남겨두기 위해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한다. 해가 전혀 지지 않는 백야가 지속되는 여름의 북극권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잘 느끼지 못하겠다. 햇빛만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너무 피곤해지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두꺼운 커튼을 치고 부분조명만 켜놓고 원고를 썼다. 자기 전 다음날 관광을 위해 질문 좀 하러 호텔 리셉션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시계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전면유리로 된 호텔 로비에는 대낮처럼 쨍쨍한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말그대로 한밤의 태양 ‘미드나이트 선’이었다. 아주 잠깐 ‘낮 12시인가’라고 착각했다.

24시간 리셉션을 여는 호텔의 밤시간대에는 주로 젊은 수습이나 계약직 직원들이 지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상냥한 남자직원에게 말을 걸며 “이렇게 햇빛이 나니 나 도저히 잠못잘 것 같다” 하니 “수면제 있는데 좀 줄까”하고 무척 걱정하는 표정을 한다. 피곤하지만 않으면 그대로 나가볼까 할 정도로 신기한데, 이를 사진 찍어 보여줘야 낮 12시인지, 밤 12시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았다.

6월24일 새벽 6시께 잠에서 깨니 항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내 방에서는 노르웨이 해안선을 따라 도는 크루즈 후티루텐이 정박해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스로 원고를 e-메일로 보내고 어제 직원이 알려준대로 일요일 오전 11시 예배시간에 맞춰 함메르페스트 교회로 뛰었다. 비명이라도 지르듯,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끊임없이 꽥꽥 울어대던 기러기들도 주일 교회 종소리가 울려퍼질 때만은 조용해진다.

평화롭다. 조금 늦었는데 교회에는 드레스로 한껏 성장한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와있다. 사제의 노르웨이어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여자 아기의 세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어 이어진 예배시간 내내 짜증이 난 아기는 울어대고 그에 따라 사제의 설교 목소리도 톤이 올라가는 기묘한 예배였다.

교회 밖을 나서면 바로 묘지다. 난 언제나 유럽의 조용하고 공원같은 묘지를 둘러보는게 좋다. (한국에도 이런 식의 양화진 선교사 묘지가 있다) 날이 맑으니 돌비석 앞에 꽃을 심으러 나온 할머니 두 분이 보인다. 먼저 간 배우자의 무덤일까.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짙은 청색의 하늘과 그를 비추고 있는 바다의 조화, 그 아름다운 빛깔에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그 하늘에 성운모양으로 퍼져나가는 구름의 형태가 신비감을 더한다.
◇중장비까지 도시 전체가 짙은 청색

그러고보니 (행정이 미치는) 최북단 도시 함메르페스트는 청색의 도시였다. 바다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어 어찌보면 호수같은 바다를 접한 만을 따라 길게 도시가 형성돼 있는데 곳곳이 푸른색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파란색을 열렬히들 사랑하는가 보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깊은 푸른색 투성일 수 있을까. 블루의 어우러짐이 청결하면서도 청명한 느낌을 주고 있다. 처음에 눈에 띄는 것은 청회색부터 코발트블루, 생생한 파란색까지 톤을 달리해 칠해놓은 목조가옥들이 보여주는 갖가지 채도의 하모니였다. 나는 블루가 만들어 내는 색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눈이 부신 데도 선글라스를 벗었다. 청색이 보이는 곳에는 모두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끝이 없었다.

교회 옆쪽의 건물은 예레이스닝스무세, 전후 재건 박물관이다. 2차대전 당시 퇴각하던 독일군은 진입하는 러시아 군대에 식량 보급기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마을을 불태웠고, 당시 도시의 3분의 2이상이 파괴됐다. 배를 타고 피란해 동굴에서 살던 고생담, 다시 집들을 건축해 도시를 조성하게 된 이야기들과 함께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보여주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볼 수도 있다. 나무로 만든 갖가지 물건들도 신기하다. 낮은 사다리로 변형시킬 수 있는 의자나 차례로 상자가 열리는 반짓고리 등이다. 버튼을 누르고 작은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당대를 담은 필름도 볼 수 있다. 안 그래도 한국전쟁 발발일 전날인지라 전쟁을 겪은 민족으로 남 일 같지 않다.

이곳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파스텔톤 하늘색 내벽의 가옥, 파란색 의자, 그리고 외벽공사를 위해 쳐놓은 짙푸른색 그물 가림막이다. 이들은 공사를 하면서도 푸른색을 쓴다. 컨테이너, 기중기같은 중장비에도 파란색이 빠지질 않는다. 자동차도 유난히 청색이 많다. 각종 간판도 청색 투성이고 디스플레이 해놓은 옷들도 청색이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입은 티셔츠나 겉옷도 깊은 청색이 유난히 많다.

▲ 세계 최북단 도시 함메르페스트.
딥 블루의 다양한 변주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청색이 보이는 곳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도시 탐방에 나섰다. 과연 눈이 시릴 듯한 이 청색은 붉은 바탕에 새겨진 흰 북극곰 마크와 함께 이 도시의 상징색이다. 내가 묵는 톤호텔 쪽으로 다시 와 보이는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각종 조형물들이 늘어서있는데 청색이 빠진 곳이 없다. 계단 위쪽으로 보이는 것은 이곳 태생의 유명 음악가 올레 올센 흉상과 뮤직 파빌리온. 창도 200주년을 맞아 1989년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북위 70도39분48초를 알리는 숫자와 함께 짙은 푸른색이고, 광장 분수대 왼쪽에 위치한 북극의 초입을 알리는 도금된 왕관이 올려져 있는 조형물 역시 빙원 위 은빛 북극곰 동상들과 같은 푸른색 반원 안에 들어가 있다. 얼음덩어리 위의 북극선 나무 모형에도 푸른 색이 빠질 수 없다. 역시 창도 200주년 행사를 기념해 만들어져 북극 사냥과 어업이 이 도시의 주요 산업임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한다.

물빛, 하늘빛을 닮은 이 도시. 푸른색 창들을 한 건물들의 유리창에는 이 짙은 푸른빛이 그대로 비춰보이며 오묘하게 아름다운 빛을 반사해낸다. 곳곳에 푸르게 빛나는 하늘빛을 머금은 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 꼭 들러야할 곳에 늦고 말았다.

로열 에이션트 북극곰협회(http://english.isbjornklubben.no)는 이 지역 관광안내소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작은 공간 안에 북극곰과 여우, 수달류, 조류 등 각종 북극 생물들의 박제가 빼곡히 들어차있다. 이곳의 수장인 이베르센(Knut-Arne Iversen)씨와 잠시 인사를 나눌 시간은 있었다. 6, 7월만 평일엔 새벽 6시~오후 6시, 주말에도 쉬지 않고 새벽 6시~오후 4시에 문을 연다. 내가 들이닥친 시간은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각, 당번 한 명만 남기고 모두 퇴근하던 참이다.

북유럽인 답지 않게 새벽과 주말까지 부지런을 떠는 것은 후티루텐이 정박하는 시간 동안 관광객들이 들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루 2번, 오전 5시16분~6시45분, 오전 11시15분~12시45분 이 크루즈가 서면 6, 7월 동안만 한 시간짜리 도시 가이드투어가 이뤄진다. 가격은 235 크로네라고. 매일 오후 2시에 5명 정도만 모이면 이 북극곰협회만도 가이드를 해준단다. 내일 아침이며 떠나야하는데 사전 정보가 없어 이 시간에 맞추지 못한 것이 영 아쉽다. 짧은 시간 동안 전시를 둘러보고 북극곰인형 열쇠고리까지 기념으로 하나 샀다. 북극해 쪽에서도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이라 북극 사냥과 어업의 중심지가 됐으며, 이곳에서는 이 지역의 전통 보존과 동시에 북극생물 보호에도 힘쓰고 있다.

◇하늘빛, 물빛 닮은 도시는 ‘그리움’

이곳을 나서 도시 반대편의 자오선 기둥을 향해 걸었다. 대양으로 터져있는 입구를 중심으로 쑥 들어와 차있는 바다를 따라 길쭉하게 퍼져있는 도시, 맞은편에 보이는 지역이다. 도보로 한 40여분 걸리는 곳이라 꽤 걸어야하지만 ‘푸른빛 찾기’ 놀이에 별로 지루하지는 않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상점의 쇼윈도를 들여다보니 냉장고같은 가전제품조차 청색이다. 길거리에 내팽겨친 무슨 플래스틱 대형 대야조차 짙푸른색이니 이 도시사람들은 ‘블루홀릭’인 것 같다. 바다를 쭉 둘러싼 안전 철제보호대도 청색이다.

목재가옥들 사이로 이를 따라 석판을 켜켜히 쌓아놓은 듯한 바위산 단층이 드러나있고, 눈녹은 물이 시내가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무성한 풀들이 솟아오른 사이사이 손톱만한 작은 꽃들이 별처럼 흩어져있고, 여름을 맞아 정원에 심어놓은 꽃들도 화려하다. 집들은 물론 버스정류소도 도시의 상징색인 코발트블루 빛이다. 하늘도, 바다도, 짙은 푸른빛이 마음도 눈도 시원하게 해준다. 점점 더 이 도시의 매력에 취해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자오선 기둥(The Meridian Column, Meridianstøtten)이 선박장이 들어선 초원 언덕에 외롭게 서있다. 1854년 세계최초로 지구둘레를 측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거기서 바다 끝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야외박물관이 있는데 이름만 거창하지 나무 펜스를 둘러놓고 나폴레옹 전쟁때 쓰인 것이라는, 붉은 색으로 칠해놓은 나무 대포 받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주변으로는 장작과 숯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는데 23일 토요일 ‘미드서머데이(하지축제)’를 즐긴 흔적이 아닌가 싶다.

호텔과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하지를 기념해 뭘 하냐고 물어봤더니 하나같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야외 쪽에 큰 불 피워놓고 그래” 했다. “소방서에 경찰서에 꼭 신고를 하고 불피워야한다”며 우리에게 ‘쥐불놀이’ 하고 잘 놀아라고 물어본 듯 ‘누가 요즘 그런거 하니’하는 듯 뜬금없다는 반응들이다.

얼마나 셔터를 눌러댔는지 중간에 호텔에 한 번 들러 노트북 컴퓨터에 찍은 사진을 옮겨놓고 왔는데도 디지털카메라 CF카드도 거의 꽉 차고 배터리도 나가버렸다. 빛이 반사돼 잘 보이지 않는 스마트폰 화면을 감으로 들이대고 사진을 계속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검둥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펜스 사이에 난 개구멍을 들락거리며 즐겁게 노는 개를 따라 어린 딸을 데리고 현지인 남자가 나타났다. 목에 커다란 카메라를 맨 것이 화창한 날씨에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러 나온 것 같다. “네 개니? 나도 검은 푸들을 키워”하고 말을 시키니 “스웨디시랩도그인데 사미인들이 순록 칠 때 쓰는 개”라고 알려준다. 이름은 ‘샤파’, 사미어로 ‘검은색’이라는 뜻이란다.

연이어 “혹 정책적으로 청색만 쓰자고 약속이라도 한거니? 하늘빛, 바닷빛을 그대로 닮은 이 도시의 푸른색이 너무나 아름답다”라고 하니, 남자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하늘빛? 1년중 반이 밤만 지속되는 거 아니? 최근까지도 계속 흐리고 비가 왔어. 어제부터 겨우 이렇게 태양이 보이는 거야” 한다. 멀리 투리스투아(Turistua) 레스토랑이 보이는 살렌 힐 전망대를 가리키며 “저기 한번 올라가보는 거 어때, 어제 진짜 날씨 좋았지”라며 그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삼성 갤럭시폰으로 찍어 저장된 사진들을 보여준다.

아하, 그때야 깨달았다. 이들은 푸른빛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 곳곳을 청색빛으로 칠해놓고, 여름 한 때 반짝, 이 푸른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확실히 어제 처음 여기 도착했을때보다 온도가 슬슬 내려가는 기미가 보이면서 하늘에도 어스름이 오기 시작했다. 북극곰협회도 한 번 더 찾아보고 여기서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드물게 화창했던 어느 백야의 여름 하루, 이 도시를 가득 채웠던 푸른빛을 내 마음 한켠에 소중히 접어 보관해놓고….

식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톤호텔 525호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질 것 같다. 떠나야한다는 것이 조금 슬퍼졌다. 함메르페스트의 짧고 빛나던 한 때는 그 현지인 사내처럼 나에게도 기나긴 그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