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0)]후원자이자 예술가 휘트니

기사입력 : 2012-11-08 10:02 (최종수정 2017-03-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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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10)]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시대상황과 맞서 싸우는 역동성이 미술관 모토



우아하고 독특한 색깔 지닌 후원자이자 예술가


살아있는 도전정신 휘트니 미술관으로 이어져

워싱턴DC ‘타이타닉 기념비’와 팬 아메리칸 빌딩 분수조각으로도 유명



▲ 에드워드 하퍼 휘트니 컬렉션

[글로벌이코노믹=김민희 예술기획가] 2011년 6월 11일부터 9월 25일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는 제목으로 휘트니 미술관 소장품전이 열렸다. 뉴욕 4대 미술관중 하나인 휘트니 미술관은 필자가 뉴욕에 있을 때에 자주 찾았던 미술관이라 매우 반가웠던 전시다. 미술관 안에 있는 사라베스 브런치 레스토랑에는 한국 분이 매니저로 계셔서 더욱 친근했고, 무엇보다 미술관에 가면 늘 새로운 전시와 작품들을 만날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주목했던 것은 2년마다 열리는 ‘휘트니 비엔날레’였다.

휘트니 미술관은 미국미술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휘트니 비엔날레를 통해서는 세계 신인 아티스트들을 후원하고 실험적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때가 되면 뉴욕 사람들의 입에는 비엔날레의 작가 이야기로 뜨겁다. 뛰어난 기획전시로 유명한 휘트니 뮤지엄의 창시자는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 이하 휘트니)다. 미술 역사에서 여성 후원자의 역할은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해왔는데, 휘트니도 그 중 하나다.
우아하고 독특한 색을 지닌 그녀는 이타주의자다. 예술가들을 후원할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적극적 기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휘트니 미술관의 살아있는 도전 정신은 창시자인 휘트니의 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휘트니는 철도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아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의 딸로 태어났다. 부의 행운을 안고 태어난 그녀는 뉴욕의 집과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에 있는 여름 별장을 오가며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언니가 있었으나 다섯 살 때 사망하고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남동생 사이에 유일한 여자로 자라게 되었다. 늘 혼자라는 외로움과 자신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남자가 되기를 갈망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였을까. 그녀는 매우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이 되었다. 남성적 성향을 보이며 톰보이로 자라났지만 1869년 은행갑부 가문의 아들이자 스포츠맨인 해리 패인 휘트니(Harry Payne Whitney·1872~1930)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고 세 자녀를 두었다.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로버트 헨리
휘트니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예술 후원자이자 컬렉터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1901년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여행을 다니며 뮤지엄을 둘러보고 아티스트들과 교제하면서 조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세 명의 훌륭한 스승 밑에서 조각을 배웠다. 뉴욕의 아트스튜던트 리그에 지원해 공부했고, 로댕에게 직접 훈련 받았다. 심플하며 대리석 조각의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는 그녀의 작품은 힘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예술가였던 휘트니의 작품은 미국에서 공공미술조각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워싱턴 DC의 ‘타이타닉 기념비’와 팬 아메리칸 빌딩에 있는 분수조각으로 재능을 인정받게 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조각가로 휘트니의 열정과 재능은 그녀의 부유한 배경을 떠나 서서히 사람들과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존경과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한번은 맥배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 가서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그들이 작품을 전시할 곳을 찾기가 힘들다며 매우 열악한 환경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휘트니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내주어 벽을 사용해 전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특히 여성 아티스트들을 후원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생겼다.

1913년 자신과 남편이 소유한 부동산이었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타운하우스에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열어 미국의 젊은 아티스트들, 특히 실력은 있지만 가난하고 아직 무명이라 딜러들에게 발탁되기 힘든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후원하고 전시할 공간과 판매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클럽을 오픈한 것이었다. 클럽의 작가로는 로버트 헨리, 윌리엄 J. 그랙켄, 존 스론, 조지 럭스와 아더 B. 데이비스 등이다. 휘트니는 자신이 프로모션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구입했다. 작업공간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시동생이 매니저로 일하며 클럽을 관리했다.

▲ 존 슬론 휘트니 컬렉션
1928년에는 ‘휘트니 스튜디오 갤러리’로 이름을 변경하고 또 다른 젊은 아티스트들, 조셉 스텔라, 찰스 실러, 레시날드 마쉬, 에드워드 호퍼, 존 스투어트 커리, 스뉴어트 데이비스를 후원했다.

휘트니의 컨템포러리 미국 미술을 주제로 한 개인 컬렉션은 뉴욕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며 더욱 자라나기 시작했다. 25년간 컬렉팅한 작품 500여 점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기증하고자 했으나 보수적인 관장의 반대로 거절당했다. 휘트니는 동시대 미국 아티스트들을 위한 미술관을 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1930년 갤러리의 이름을 ‘휘트니 미술관’으로 바꾸어 컬렉션을 선보이게 되었다. 1914년부터 비서로 일하고 있었던 줄리아나 포스(Juliana Force)를 미술관의 첫 디렉터로 임명하였다. 휘트니 미술관은 검증된 아티스트들만 받아들였던 기존의 미술관들과는 다른 혁신적인 방법으로 결국엔 동시대 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시대적 상황과 맞서 싸우는 역동성은 지금의 휘트니 미술관을 만든 모토가 되었다. 1954년 MoMA 뒤에 작은 공간으로 이주했다가 현재의 매디슨 애비뉴에 자리를 잡았다. 거꾸로 된 계단 모양의 회색 건물은 특이한 창문이 일품인데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헝가리 출신의 건축가 마르셀 브루어(Marcel Lajos Breuer·1902~1981)와 해밀턴 P. 스미스(hamilton P. Smith)가 설계했다. 당시에는 감옥과 같다는 평을 받으며 비난 받았지만 현재는 모던하고 진보적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 휘트니 뮤지엄
휘트니 미술관은 20~21세기 미국미술 작품을 1만 8000점 가량 소장하고 있고,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들과 20세기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함께 보여주는 기획을 주로 하고 있다.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현대미술의 대가가 된 아티스트들의 작품들 또한 만날 수 있다. 이제는 휘트니 미술관이 현대미술이 부족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8년간의 장기 대여를 해주기도 한다니 정말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뉴욕이 세계적으로 미술의 중심지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후원과 기부,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생존을 향한 예술가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을 후원하는 손길을 도시를 바꾸고 사람들을 바꾼다. 휘트니 미술관은 휘트니라는 한 여성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 집념과 열정이 미국 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예술가들을 살려 뉴욕을 문화의 제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을 보면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도 미술관의 자랑거리인 비엔날레를 위해 큐레이터들이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를 하나하나 방문해서 정성을 다해 작품을 골라내고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작품이니 신선하고 새롭지 않을 수 없다.

/김민희 예술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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