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최소 자본으로 예술행위' 숙명으로부터 시작되다

공유
0

'최소 자본으로 예술행위' 숙명으로부터 시작되다

음양으로 보는 미술사(19회)-그래피티 아티스트 반달

'미술 속 록음악' 불리는 장르…시끄러운 소리 내야

순수한 자기표현 열망·사회고발 분노 함께 담아내
힘·활력·에너지 화면 과잉된 에너지로 완결

▲반달의'Agreedyswine'
▲반달의'Agreedyswine'


[글로벌이코노믹=한오 서양화가] 올해 여름 조금은 의외의 그리고 조금은 신선한 전시에 작품을 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비빔밥전’이란다. 장르와 연령을 뒤섞고 실제로 비빔밥까지 전시장에 등장하는 전시였다. 어느 정도의 호기심과 함께 조영남 작가와의 그 사건(일전에 조영남 씨 주선으로 김용옥 선생 강의 뒤풀이 겸해서 버드나무집에서 저녁을 함께하였고 대화 끝에 필자가 두 사람을 싸잡아 하이브리드 아티스트들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조금 어색해진 일) 이후 오랜만의 재회를 기대하며 전시에 참여했다.

예의 시끌벅적한 오프닝 리셉션이 끝나고 전시장을 돌아 나오는 순간 목덜미를 잡아끄는 작품이 있었다. 조그만 화면에 안료를 대충 드리핑하고 두텁게 칠해버린 그래피티 아티스트 반달의 작업이었다. 문득 1993년 월간미술에 평론가 윤진섭이 필자의 작품에 대하여 “격정의 표현술, 생동하는 이미지”라고 비평하면서 해롤드 로젠버그의 말을 인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캔버스는 하나의 투기장이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림보다 그림에 쏟아넣는 행위에 대해서 필자만큼 많이 거론된 작가도 없었지 않았는가 싶다. 많은 평론가들이 남보다 훨씬 과잉된 필자의 화면을 보고 표출의 범람이니 충동과 유희, 몸짓, 격정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그것이 칭찬인줄 알고 조금 우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본심을 내가 간파하지 못했다.

▲반달의'coffeedrawing'
▲반달의'coffeedrawing'

인상파의 화풍이 그 이전 세대의 그림보다 훨씬 표현이 자유로운 화가들로 넘쳐나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 때 불세출의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눈물을 삼키고 고독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과잉된 그의 화면은 그 시대가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음악 속에도 표현이 지나치게 과잉된 장르가 있는데 바로 ‘록’ 또는 ‘하드록’이라고 불리는 장르다. 흔히들 록은 거침없는 샤우팅과 시끄러운 연주로서 그 성격이 규명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록그룹의 거침없고 격렬한 연주와 시끄러운 소리는 자본의 대부분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로부터의 분리를 스스로 요구하는 것이며, 메이저의 자본에서 벗어나 인디로 돌아가겠다는 외침인 것이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이여, 함께 탈출하자는 비명이었다.

사실 록음악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규정은 그 가사에 있다. 가사의 내용이 기성적 가치관에 대한 반론의 제기라는데 있는 것이다. 대중이 보기에 분명히 댄스가수인 마돈나를 록가수로 분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돈나의 노래가사는 더할 나위 없이 비판적이다.

▲반달의'youngandgeneralwill'
▲반달의'youngandgeneralwill'


그래피티 아트는 미술의 록음악이다.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장 적은 자본으로 예술적 행위를 지속해야 하는 숙명으로부터 시작되어 가장 시끄러운 소리를 내야 한다.

뉴욕 할렘의 재능있는 젊고 가난한 흑인소년의 분노와 남미의 내전 속에서 고아가된 아이들의 욕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순수한 자기표현의 열망과 사회고발의 분노를 함께 담아내는 미술속의 록음악이다.

그래피티 아트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채우지 못한 욕구와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로서 시끄러운 록음악을 선택하듯이, 자본과 권력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이 오래된 담장과 낡은 전철 등 무엇으로 낙서한들 더 망가질 것이 없다는 기성세대들의 관용(?)으로 허용된 장소에 스프레이로 거칠게 그린다. 그러나 그것도 건물이 리모델링되고 도시가 리노베이션 되면 그래피티가 허용되는 공간은 점점 축소되고 그들은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찾아서 숨어든다.

요즈음은 록음악도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든지간에 자본이 지배하는 기왕의 시장에 자리를 잡아가고, 길거리를 방황하고 도시의 뒷골목을 방황하던 많은 예술가들도 화랑과는 또 다른 시장으로 편입되어서 들어온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컬렉터들과 신규화랑, 상업영화와 TV광고 속으로….

인디아트 혹은 인디밴드 등에서 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기존 시장으로 영입되어 오는 것을 보면 두 종류의 예술가군이 있다. 한 무리는 과잉되리만치 엄청난 표현력과 재능으로 넘친 능력자들이다. 지나쳐서 결국은 시장이 담지 못하는, 반달과 같은 부류들이다. 다른 한 무리는 적당한 표현력과 절제된 이성으로서 현실을 슬며시 비틀어 놓는 정도의 표현으로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뉴욕의 총아 키스헤링과 쟝 미셀 바스키야가 그렇고 반달과 동시대의 작가인 찰스장과 이동기가 그렇다. 그들은 영리하고 감각적이어서 유행을 알고 세상이 요구하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안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비위는 맞출 수 없으나 흔히 레터 칙이라고 하는 요즘 세대의 모든 소비와 구매의 선봉에 있는 20~30대 여성들의 기호에 부합하는 부류로서 젊고 유능한 큐레이터들의 인정을 받아낸다.

유행을 이끄는 이들은 커피숍과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지적하고 거리의 윈도와 간판을 바꾸며 선물가게와 펫문화를 주도하고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는다. 또한 유키 구라모토와 이루마의 연주를 즐겨 듣고 현대적인 음악회와 전시회, 영화관의 자리를 메꿔주며, 그들은 많은 자본을 갖고 비싼 물건을 사지는 않으나 방송과 광고의 흐름을 바꾸고 드라마의 OST를 구입함으로써 기존 상업방송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결국에는 기성세대의 항복을 받아내는 이들이다. 이전 세대가 갖추지 못한 감각을 지닌 세대다. 우리가 흔히 젊은이들이라고 하는 부류다.

▲반달의'wildeyeflower'
▲반달의'wildeyeflower'


반달과 필자는 전자의 작가군에 속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다. 힘과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며 화면은 과잉된 에너지로 넘치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라는 표현을 쓰며 고흐를 달리 분류한 이유는 두 작가의 작품과 달리 고흐 작품의 완결성 때문이다. 소설로 치자면 하나의 화면 속에 기승전결이 확실하게 매듭지어지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것이 고흐이고 그것은 고흐시대의 원칙이었다. 반면에 두 작가는 작품의 매듭고리가 없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진다. 두 작가의 작품들은 덧대어 나란히 붙여놓으면 한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각각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소설이 아니라 주인공이 상황마다 옮겨다니는 시리즈물과 같다고 보아야한다. 고흐는 화면을 완성하여 걸어 놓기를 유의하였고 한오와 반달의작품은 바닥과 벽면에 기대놓는 것으로도 족한 것이다. 어찌됐던 세 작가는 시대가 좋아하든, 아니하든간에 에너지가 넘치는 화면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시대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내면의 창작의지를 구현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의 힘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다수의 숫자와 그 숫자들을 조종하며 이득을 취하는 세련된 패셔니스트들과 그들의 비위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에게로 쏠리게 마련이다. 기성의 컬렉터와 권위 있는 미술관도 그들의 조종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실력 있는 가수의 노래라 하더라도 우리가 늘상 듣게 되는 가벼운 발라드와 댄스곡처럼 가까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현대미술도 세련되며 현실을 비틀어 살짝 반전을 주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가벼운 작가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현재 인기를 끌고있는 모든 작가들이 이에 속한다.

뛰어난 가창력의 가수에게도 그에 걸맞는 명곡이 있음으로서만이 존재할 수 있듯이 뛰어난 표현력의 작가들에게도 세련된 소수의 비평가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명작을 가져다놓을 전시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시나위그룹의 연주에 임재범과 한영애가 보컬을 맡는다 하더라도 박진영의 가벼운 댄스곡을 능가하는 히트곡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이 유행이고 현실이다. 다만 그들은 라이브무대를 통하여 소수의 팬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숙명이고 어떤 화가들의 숙명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대중의 가슴에 직접 다가가 문명 속에서 다듬어지고 훈련된 것이 아닌, 거칠고 원시적이며 생명이 꿈틀되는 것이 그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들뢰즈로 대변되는 21세기 예술철학의 근간이 되는 양의성에 있어서의 세련된 표현과 노출보다도 로젠버그가 말했던 투기장 같은 예술의 직진적인 행위들이 가슴 아프게 묻히는 현재에서 반달과 같은 작가들이 얼마를 견디며 버텨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초심으로 돌아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충분히 가능하다.

▲반달의'seoulcity'
▲반달의'seoulcity'


수지라는 연예인과 함께 나온 캐논카메라의 광고 동영상에 나온 반달의 모습은 이마가 넓고 하관이 빠르며 얼굴이 길쭉한 형상으로 보아 오행으로 목(木)과 화(火)의 기질을 갖춘 사람이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인상이다. 사람은 인상에서 목기를 갖추면 창의력이 높고 화기를 갖추면 순발력이 뛰어난데, 그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다.

하나가 뛰어나면 하나가 모자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목이 강하면 지나쳐서 교만하게 되고 화가 강하면 열정이 넘쳐서 냉정함이 모자라게 된다. 두 기질을 합쳐서 나오는 작품은 완결성과 다양한 배려보다는 자기만족과 과시욕을 보이게 된다.

목화(木火)가 강하면 금(金)과 수(水)가 약해지고 원색보다 희고 검은 무채색을 사용하는데 능하게 되며 꼼꼼히 작업하거나 치밀하게 완성하기 보다는 대충 빠르게 하기를 즐김으로써 스스로 생명력을 단축시킬 수 있다. 한때 각광받던 스타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동정과 사랑과 연민 보다는 절제와 냉혹함이 현실인 세상이다. 함께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다. 아! 백지영이라는 가수가 있다!!! ‘총 맞은 것처럼’을 불렀다 옛날가수들의 창법으로 과거에 유행하던 발라드보다 더욱더 구성지게 부른다. “대중이 과거를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한오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