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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이루는 여러 기하학적 요소…환상이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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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이루는 여러 기하학적 요소…환상이 춤춘다

[전혜정의 미술이 있는 삶(48)] 현실과 환상이 중첩되는 이질적 공간

2차원의 화면에 풍경과 공간에 대한 관심 풀어내

사실적 묘사보다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 보여줘
우리는 공간에 있다. 우리는 공간 속에 살고 있으며,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하고,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며, 가까이 있는 공간을 살펴보며, 멀리 있는 공간을 바라본다. 이 세상의 공간은 절대적이거나 균질하지 않으나, 세상에 생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간 속에서 존재하며, 공간을 떠나서는 공간을 바라보거나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존재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공간을 우리 모두를 담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수용기(container)로 생각하기 쉽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시공간의 상대성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과 공간에 대한 가변적인 심리적·정서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간을 이미 존재하는 절대적인 그 무언가로 느끼는 것은, 막스 야머(Max Jammer)가 지적했듯이 절대공간이라는 수용기-공간 개념이 실용적 목적에 매우 유용한 ‘유익한 환상’이기 때문이다.

최은정, Untitled, Mixed media, Oil on pannel, variable installation, 2015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Untitled, Mixed media, Oil on pannel, variable installation, 2015
최은정의 작업은 2차원의 화면에 풍경과 공간에 대한 관심을 풀어낸다.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을 뜻하는 풍경(風景)의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풍경’이란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우며 자연과 합일(合一)이 되는 이미지, ‘landscape’란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멀리 있는 경치를 바라보는 관조적인 이미지가 최은정의 풍경화에는 없다. 대신 우리가 최은정의 화면에서 마주하는 풍경들은 지극히 혼란스럽고 모호한 인공적인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최은정의 풍경들이 차갑고 쓸쓸한 도시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나무와 풀을 보고, 구름이나 폭포 비슷한 것들, 건물과 닮은 것 등 기존의 자연 풍경이나 도시 풍경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되지만, 이 풍경화의 공간들은 멀리서 관조하는 ‘풍경’이 아니라 알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성’일 뿐이다.

최은정, Landscape Sequence 2, Oil on canvas, 97 x 130 cm, 2013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Landscape Sequence 2, Oil on canvas, 97 x 130 cm, 2013


최은정, Untitled, Oil on canvas, 73 x 73 cm, 2013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Untitled, Oil on canvas, 73 x 73 cm, 2013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건축에 관심을 갖고 손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는 것을 배우면서 공간을 이루고 있는 여러 사물들의 기하학적 요소를 선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컴퓨터나 기계로 균일하게 그어진 선이 아닌 손으로 그린 선은 건축적 요소나 기하학적 요소로 공간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2차원으로 표현된 공간에 손으로 그은 드로잉을 더해 회화의 속성을 공간성에 부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은정이 구성하는 공간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공간도,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니다. 작가가 그리는 나무들은 아버지의 취미 활동인 분재(盆栽) 화분을 보고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식물의 모습에서 조형적인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은정의 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라는 모습이 아니라, 반짝이는 플라스틱 조각처럼 인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인위적인 구조나 틀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정형화되는 잘 가꾸어진 분재의 모습도 아닌 어딘가 어색하고 조야하며 규정하기 힘든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 발을 내딛는 실제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모습이 아닌 비이성적이고 알 수 없는 그림 속 허구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무의 모습은 그래서 자연이자 인공이고, 사물이자 우리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며, 추상성 가득한 화면 속에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 존재이면서도 어떤 나무인지 애매한 이름 없는 존재이다.

최은정, Floating Garden3, Mixed media on paper, 80 cm × 57 cm, 2010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Floating Garden3, Mixed media on paper, 80 cm × 57 cm, 2010
최은정, Fast growing trees, Oil on canvas, 130 x 130cm, 2012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Fast growing trees, Oil on canvas, 130 x 130cm, 2012
최은정, Structural plants, oil on canvas, 97 x 162cm, 2012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Structural plants, oil on canvas, 97 x 162cm, 2012
최은정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진이나 그림, SNS 등에서의 이미지 등 여러 이미지를 평소에 해오던 드로잉과 에스키스(esquisse·밑그림)와 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구상한다고 한다. 그림 속 물감들은 층층이 층을 이루고 있고 그 층은 깊이감을 드러낸다. 그림 속의 직선과 사선이 만드는 격자무늬와 도형적 요소들은 평평한 화면에 공간감을 부여하고, 비현실성을 배가한다. 초기작에서 도형적 요소와 풍경적 요소를 결합하여 지적이고 조용한 이질적 공간감을 보여주었던 작가는 최근작으로 오면서 다양한 색의 물감들이 화면을 점령하면서 점점 더 규정할 수 없는 공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캔버스는 사각의 틀에서 벗어나 이제 잘리고 다시 붙이고 기울어지고 앞으로 튀어나온다. 화면 속에는 박제된 모습의 나무들과 짓고 있는 중 혹은 철거하는 중인 건축물 골조들이 보이며 기하학적 선의 요소들이 맥락 없이 아우성치고 있다. 알아볼 수 있는 형상 기저에 소용돌이치던 색색의 물감들은 다시 화면 위에 뚝뚝 떨어지며 작가가 그림을 그린 중첩된 시간만큼 다양한 시간의 겹쳐짐을 보여주며, 빈 캔버스와 우리 사이에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듯 보인다.

최은정, Stone Forest, Oil on canvas, 126 x 86cm, 2015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Stone Forest, Oil on canvas, 126 x 86cm, 2015
흥미롭게도 캔버스 속 이미지들, 혹은 캔버스 밖에 놓인 여러 가지 것들은 우리가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혹은 화면 속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의 공간 속으로 튀어나오는 ‘문’과 ‘틈’의 역할을 한다. 선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각형 사이의 여백과 문, 커튼, 그물, 아치형의 도형이나 무지개, 폭포나 분수 같아 보이는 분출적 이미지 같은 것들은 잘라내고 붙인 캔버스의 틈처럼 화면 속 틈을 이루어내어 우리의 실공간과 화면의 허구적 공간 사이에 끊임없는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림 속의 여러 가지 조형적 요소들을 밖으로 꺼내기 위해 배치했다는 여러 오브제들은 조형의 요소를 강조함과 동시에 그림 속 세상과 그림 밖의 공간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음으로써 우리를 그림 속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이끄는 문이자, 화면 속 허구들이 밖으로 나가는 틈의 역할을 한다.
최은정, From Within and Without, Mixed media, Oil on canvas, variable installation, 2015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From Within and Without, Mixed media, Oil on canvas, variable installation, 2015
“작업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내면에 떠도는 풍경을 포착하여 기록하거나 주위의 도시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어떻게 보면 완벽한 이상향으로서 우리가 꿈꾸고 원하는 곳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공간과도 같은 곳이다.” 작가가 설명했듯이 작가가 꾸며놓은 공간은 자연과 인간, 사물과 관념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뒤섞여 알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설정했다가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처럼, 최은정의 회화 속 공간은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하나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설명될 듯하나 동시에 규정할 수 없는 난장(亂場)같은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총합적인 아름다운 풍경의 모습이 아니라 단편화되고 파편화된 세계다.

최은정, Oblique garden ,Oil on canvas, 130 x 273 cm, 2014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Oblique garden ,Oil on canvas, 130 x 273 cm, 2014
분재를 보면서 큰 나무를 작게 만들어 큰 존재인 우리가 작은 나무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관계와 시선의 역전이 발생하고, 다시 그 작은 나무를 크게 상상하면서 우리의 존재가 분재된 나무보다도 더 작은 것으로 환원되듯 느껴지는 환상의 역전 상황이 최은정의 작품을 볼 때도 발생한다. 우리는 최은정의 작품 앞에 서서 그 작품을 보다가 화면 속으로 들어가고, 화면의 이미지들은 소리치듯 꿈틀대며 화면 밖으로 나온다. 다시 우리는 우리의 공간에, 이미지는 화면에 있어야 하나 실상 그 어느 것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불안정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와 공간과의 관계도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도 어느 것도 이성적이고 고정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 우리는 공간에 살고 있다. 그 공간은 파라다이스도, 유토피아도, 잘 꾸며진 정원도 아니지만 서로 관계하며 안으로 밖으로 부딪치며 상호적으로 점유와 소통을 반복하고 있다. 혼돈 속 세계의 모습. 그것이 최은정의 화면이 내비치는 공간의 모습이다. 우리의 현실이며 환상이다.

최은정, Impossible Island, Oil on canvas, 86 x 128cm, 2015이미지 확대보기
최은정, Impossible Island, Oil on canvas, 86 x 128cm, 2015

●작가 최은정은 누구?
인천가톨릭대학교 회화과 및 홍익대대학원에서 회화과 석사 졸업 후 미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SOMA Drawing Center 아카이브 작가로 선정(2006년)되어 활동했으며, 드로잉비엔날레(2013), 송은미술대상(2013), 중앙미술대전(2014)에서 수상하였다. 한전아트센터와 아트컴퍼니 긱에서의 개인전과 문화역 서울, 예술의 전당, 포스코갤러리, 인천아트플랫폼 등에서 그룹전을 가졌다. 작가가 내면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일컫는 ‘현대적 픽처레스크(picturesque)’ 작업을 평면 회화를 중심으로 하여 변형된 캔버스, 오브제 및 조명을 이용한 설치 등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필자 전혜정은 누구?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 강의를 통해 예술의 감상과 소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자와 감상자, 예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아트씨드프로젝트(ART Seed Project): 시각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민대 대학원 등에서 전시기획, 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전혜정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