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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통해 자신과 대화하고 세상과 조용하게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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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통해 자신과 대화하고 세상과 조용하게 만난다

[전혜정의 미술이 있는 삶(49)] 걷기, 사유의 흔적

걸으면 나아가는 듯 하지만 멈추어서 인생 돌아보게 해

걷기는 수단적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있는 과정
걷는다는 행위는 가장 일상적인 일이자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목적을 향하여 가고 생각하며 기억한다. 순례자들은 오랫동안 길을 걸으며 땅과 하늘 가운데 있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신과 대화했고, 많은 철학자들은 걷기를 통해 자신들의 사유를 세상의 가장 깊은 곳까지 끌고 갔다.

테리 루엡, 해류 Drift, 2004 ⓒ2004 teri rueb이미지 확대보기
테리 루엡, 해류 Drift, 2004 ⓒ2004 teri rueb
테리 루엡(Teri Rueb)은 직접적인 걷기의 방법을 통해 자신 속에 좀 더 머물러 스스로를 더 잘 알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세상과 조용한 방법으로 조우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류 Drift>는 GPS를 이용해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관람객은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기기가 들어있는 백팩을 메고 이어폰을 꽂은 채 해변가를 걷는다. 가방 속 기기는 조류의 흐름, 관람자의 발자국 등을 계산하고, 이어폰에서는 파도소리, 바람소리, 새들, 발자국 소리 등이 들린 뒤 루소, 제임스 조이스, 단테 등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들려준다. “우리의 삶을 여행하는 도중에, 나는 길을 잃어서 내 자신이 깊은 숲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단테) “그리고 거기, 배에서 몸을 쭉 뻗으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혼란스럽지만 기쁜 수천가지의 몽상에 빠져든 채 내 몸이 물의 흐름에 따라 몇 시간이고 천천히 앞뒤로 흔들리도록 했다.”(루소)

관람객은 걸어가면서 들었던 그 텍스트를 다시 들으려고 해도 동일한 텍스트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확한 물리적 서술적 지형의 부재로 우리는 주변 환경을 온전히 지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 다시금 그 텍스트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반영해주는 그런 낯선 이를 만나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주변 환경의 소리와 이어폰에서의 소리와의 특별한 조우는 끊임없는 삶의 여정과도 같다.

테리 루엡, 흔적 Trace, 1999 ⓒ2004 teri rueb이미지 확대보기
테리 루엡, 흔적 Trace, 1999 ⓒ2004 teri rueb
<흔적 Trace>은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요코 국립공원 하이킹 코스에서 이루어진 장소 특정적 사운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애도를 녹음한 풍경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기념비 대신에, 관람객들은 추모 공원을 걷는 것처럼 작품과 함께 걸으며 풍경의 움직임에 따라 추모시와 추모 노래 등을 들으며 그 길을 간다. 작품은 지원자들이 녹음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와 소형 컴퓨터, 헤드폰, 위성 수신기가 장착된 백팩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음된 소리는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기억의 편린이나 죽음과 상실에 관한 글들로 이루어졌다. 관람자들은 조용한 레퀴엠(requiem)과 같은 이 녹음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백팩을 메고 산길을 걷는다. 녹음된 기억들은 백팩에 들어있는 컴퓨터와 GPS로 각 관람자의 움직임과 풍경의 위치에 따라 반응하게 된다. 관람자가 바라보는 산의 풍경, 산소리, 물소리, 새소리는 길을 걸어감에 따라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슬픈 추모의 마음과 하나로 엮어진다.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가 “흔적의 비석과 흔적의 신기루를 동시에 제의하면서, 흔적은 흔적을 남기며 동시에 흔적을 지우는, 살아 있으나 동시에 죽어 있는, 그리고 늘 그러하듯 삶을 위장하여 간직하고 있는 표기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피라미드처럼. 뛰어넘을 수 있는 돌벽이 아니라 벽에 붙어 있는 돌, 달리 해독되어야 할 소리 없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고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망자를 기억하며 또한 망자를 잊고,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 하지만 또한 멈추어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테리 루엡, 일상 움직임의 안무 The Choreography of Everyday Movement, 2001 ⓒ2004 teri rueb이미지 확대보기
테리 루엡, 일상 움직임의 안무 The Choreography of Everyday Movement, 2001 ⓒ2004 teri rueb
“장소(place)는 동사(verb)입니다. 장소를 만들고 장소의 의미를 규정하는 ‘장소성(placings)’은 물리적이고 지어진 환경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펼쳐 놓습니다. 풍경은 특별한 종류의 ‘장소성’입니다. 이전 작품에서 나는 매우 장소특정적인 실외 설치작품을 제작했고, 거기에서는 여러 소리의 층이 만들어져 풍경에 놓여져 듣는 것과 보는 것 간에 일관된 결합성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구성적 과정을 통해 나는 장소와 공동체, 그리고 그 사회·문화·역사적 문맥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직접적으로 연관지어 풍경을 틀 지우고 해석합니다.” 루엡의 설명처럼 우리는 동사인 장소와 소통하는 주체이다. 루엡은 아름다운 시골 마을과 정원을 돌아다니기도 하고(<어딘가 다른 곳에서 With Elsewhere : Anderswo>), 도시민들의 이동경로를 기록으로 보여주기도 하며(<일상 움직임의 안무 The Choreography of Everyday Movement>) 동사로서의 장소성을 보여준다.
테리 루엡, 무제 Untitled, 1996 ⓒ2004 teri rueb
테리 루엡, 무제 Untitled, 1996 ⓒ2004 teri rueb

테리 루엡, 눈덩이 Snowball, 2000 ⓒ2004 teri rueb
테리 루엡, 눈덩이 Snowball, 2000 ⓒ2004 teri rueb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루엡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다. <무제 Untitled)>에서는 집게 사이의 얼음이 점차 녹아 작은 컵에 담긴 붉은 잉크에 떨어지며 티슈에 점차적으로 얼룩을 남긴다. <눈덩이 Snowball>는 2000년 여름 3주간 매일 세 시간씩 400시간 동안 손으로 굴려 만든 거대한 소금 덩어리이다. 소금과 접착제만으로 이루어진 이 덩어리는 처음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배 정도의 크기로 시작했다가 지금 60㎝ 정도의 큰 공과 같이 되어 야외에 설치되었다. 외부에 노출된 소금덩어리 공은 점점 용해되어 고드름 결정체를 만드는 것처럼 흘러내렸고, 조각의 기저를 이루는 소금 결정의 눈과 같은 표면을 형성하며, 염분 용해액 웅덩이를 만들었다.

장소가 멈추어져 있는 빈 공간 혹은 죽어있는 기념비가 아닌 것처럼, 걷기는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향해가는 일련의 수단적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있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걷기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흔적을 남긴다. 우리 행위의 흔적은 곧 우리 사유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우리의 인생이다. 나의 삶이다.

작가 테리 루엡(Teri Rueb)은 누구?
인터랙티브 미디어, 사운드 아트, 환경 예술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테리 루엡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반프 센터(the Banff Centre)에서 GPS를 기반으로 한 선구적인 인터랙티브 설치 프로젝트 “흔적”을 발표했다. 2008년 프릭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상(Prix Ars Electronica Award)을 수상하고, 2012년 칼아트 아퍼트 상(CalArts Alpert Award), 록펠러 뉴미디어 상(the Rockefeller New Media Award), 보스턴 ICA 포스터 상(the Boston ICA Foster Prize) 등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루엡은 현재 버팔로에 위치한 뉴욕 주립대학 미디어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디어와 생태, 문화를 결합한 오픈 에어 인스티튜트(the Open Air Institute)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 필자 전혜정은 누구?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 강의를 통해 예술의 감상과 소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자와 감상자, 예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아트씨드프로젝트(ART Seed Project): 시각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민대 대학원 등에서 전시기획, 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전혜정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