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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작은 설렘 깨달았을 때 느끼는 행복 화폭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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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작은 설렘 깨달았을 때 느끼는 행복 화폭에 담아

[전혜정의 미술이 있는 삶(54)] 숙녀, 산책을 하다

편안하고 행복해하는 자연과의 순간을 담아 공유

주변의 소박한 자연을 즐기는 호사스러움에 자족
누구나 어른이 된다. 우리는 어느 순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른이 되어 내가 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철이 든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 어린 아이일 때 그렇게 빨리 되고 싶던 어른의 삶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른이 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속의 어린 아이가 사라짐을 어느덧 아쉬워하게 된다.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세월은 거슬러 갈 수 없지만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중첩되는 현재 속에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지금의 나를 겹쳐 놓는다.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에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시시하거나 소소하게만 느껴졌던 것에서 어린 시절에 그러했듯이 작은 흥분을 느낄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고요한 샘에 작은 돌이 던져지듯 설렘의 파문이 인다. 이는 행복이다.

송숙녀 작 숙녀-앵두나무, 캔버스에 아크릴, 2013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앵두나무, 캔버스에 아크릴, 2013
송숙녀 작 숙녀-앵두,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송숙녀 작 숙녀-앵두,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송숙녀의 그림에는 그런 작은 설렘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행복을 담고 있다. 그림의 소재는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릇, 화분, 그리고 산책길에 만난 꽃과 나뭇가지들이다. 우리는 송숙녀의 그림 속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것들이 번잡스런 삶 속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우리를 바라다보고 우리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겨 그 작은 평화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해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산책하다 만난 겨울의 마른 풀잎과 꽃, 좀작살나뭇가지, 앵두나무, 능소화, 산딸기, 들풀들,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식물들은 작가를 만난 그 모습대로 작가의 손에 소담스럽게 쥐어진 채 우리를 향해 있다. 우리의 시선은 작가의 시선과 같이 작은 것들을 바라보거나 혹은 그 작은 것들을 쥔 작가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송숙녀의 그림들은 낮은 시선으로 우리 앞에 선다. 화분 하나씩이 표현된 그림에서는 화분과 대화하듯 눈높이가 같고, 작가의 시선으로 산책하는 발끝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꽃과 나무들을 들고 있는 그 손을 가까이 다가가 보고 있다. 우리의 시선은 아름다움을 탐욕하는 관음증적인 시선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이야기하고 걸으며 같은 눈높이에서 대단치 않은 존재들이 발하는 놀라운 아름다움의 빛을 보고 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높은 곳으로만 달려 온 시선을 거두어 작은 것에서도 흥분하고 설레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와 겹쳐진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의 설렘과 기쁨이 아직도 마음 속에 샘솟고 있는 어른 ‘숙녀’가 되어 있다.

송숙녀 작 흔적, 혼합매체, 1998
송숙녀 작 흔적, 혼합매체, 1998
송숙녀 작 숙녀- 작은들풀 바라보다, 장지에 혼합재료, 2015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 작은들풀 바라보다, 장지에 혼합재료, 2015
오랜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이미지들을 단순화한 추상작업을 탐구하던 작가는 머리로 이미지들을 배치해 조형적 만족감을 주려했던 기존의 작업에서 한계를 느껴 자신의 감성과 이야기를 그림 속에서 공유하기로 하면서 구상작업으로 큰 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도 동일한 ‘숙녀’를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숙녀(淑女)의 한자어 그대로 ‘맑은’ 감성을 지닌 모습으로 우리에게 소담스런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손을 내밀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만지며 행복해 하는 그 모습과 행동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가장 예쁜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 느낌을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의 설명처럼 가장 예쁜 순간을 사진 찍어 남기는 것처럼, 송숙녀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 하는 자연과의 순간을 담아 이를 정겨운 마음으로 공유한다.

송숙녀 작 숙녀,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송숙녀 작 숙녀,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송숙녀 작 숙녀-능소화, 종이 위에 수채, 2014
송숙녀 작 숙녀-능소화, 종이 위에 수채, 2014
송숙녀 작 잔대꽃화분,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송숙녀 작 잔대꽃화분,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쾌락주의로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kuros)는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우정, 자유, 사색이 그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혹은 지금 아무리 힘든 상황이더라도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느릿느릿 산책하면서 이것저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커다란 나무 가지들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내 옆의 부드러운 풀밭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드러누워, 별로 돈을 들이지 않고도 자신의 몸을 상쾌하게 가꿀 때면 본성은 결코 이런 호사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리라. 날씨까지 그들을 향해서 미소 짓고, 계절이 푸른 초원을 꽃들로 점점이 장식할 때라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만물의 본성에 대하여』 중에서) 알려진 바와 달리 에피쿠로스는 작은 것을 취할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위하여 매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갈구하느라고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채워가듯 우리의 욕망에 집중한 채 계속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욕망은 기표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고리다. 대상은 신기루처럼 잡는 순간 저만큼 물러나며,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는다. 어떤 것도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으며, 결국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송숙녀 작 숙녀- 내 생의 봄날, 아르쉬지에 혼합재료, 2015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 내 생의 봄날, 아르쉬지에 혼합재료, 2015
송숙녀 작 숙녀- 좀작살나무 바라보다, 아르쉬지에 혼합재료, 2015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 좀작살나무 바라보다, 아르쉬지에 혼합재료, 2015
송숙녀의 그림들은 주변의 소박한 자연을 즐기는 호사스러움에 자족하고 미소 짓는다. 숙녀의 손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얼굴이 결핍된 욕망의 기표를 표현하며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쥐고 더 많은 표정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다소 부족한 자연과 삶의 편린들이 주는 조용한 울림을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 없는 숙녀의 손과 손에 담긴 보석과도 같은 풀들, 나무들, 꽃들, 열매들, 그리고 그 자연물을 닮은 작가의 옷차림에서 우리는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아내,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나의 동생, 나의 언니와 누이가 숙녀가 되어 우리에게 내민 손을 함께 보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숙녀는 추억하고 싶은 모습이 자연 속에서 되살아난 나의 거울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숙녀와 함께 산책을 한다. 그 현재의 산책길에는 과거의 나의 추억과 현재의 나의 즐거움, 그리고 미래의 나의 설렘이 조용히 함께 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이 보내는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산책길에 번져오는 위안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은 기쁨이 밝게 빛난다. 숙녀와 함께 하는 산책길 속에서 우리는 어린이이고 어른인 숙녀가 된다.
송숙녀 작 숙녀 -겨울꽃, 장지에 혼합재료, 2014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 -겨울꽃,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송숙녀 작 숙녀, 장지에 혼합재료, 2014이미지 확대보기
송숙녀 작 숙녀, 장지에 혼합재료, 2014
송숙녀 작 숙녀, 2015
송숙녀 작 숙녀, 2015


● 작가 송숙녀는 누구?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대구미술대전 입선(98년, 99년), 전국 대학미전 특선(98년) 등의 수상경력이 있다. 추상에 가까운 비구상 작업을 하다, 좀 더 직접적인 내러티브가 드러나는 구상작품을 하고 있으며, 본인의 이름을 따서 ‘숙녀’ 시리즈로 명명하고 있다. 경북 문경에서 어린이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미술교육과 작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어린이의 감성을 지닌 어른들을 위한 작업을 구상 중이다.

● 필자 전혜정은 누구?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 강의를 통해 예술의 감상과 소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자와 감상자, 예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아트씨드프로젝트(ART Seed Project): 시각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민대 대학원 등에서 전시기획, 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전혜정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