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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한 겨울의 봄날, 다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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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한 겨울의 봄날, 다시 희망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휴일 한낮에 쏟아져 내린 햇볕은 봄을 닮아 있었다. 반짝여서 눈부셨고 따뜻해서 나른했다. 한강 양쪽의 도로 위에는 12월의 봄날을 즐기러 나다녀온 차들로 그득했다. 차의 행렬은 길고 느리게 몰려가고 몰려왔다. 한강시민공원의 주차장마다 나들이 나온 차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봄기운을 품은 겨울 해 아래로 사람들은 쏟아져 나왔고, 오래도록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 해는 일찍 미끄러지는 것이어서 햇빛이 모두 소멸한 저녁의 거리로 바람은 다시 겨울을 뿌리며 다녔다.

또 하나의 해가 저물고 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세상의 추한 비밀들을 모조리 비추고 드러내었던 특별한 해가 고단한 몸을 누일 자리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언제나 국민과 민생, 국가를 말머리에 앞세웠던 권력자와 그의 무리가 무대의 장막 뒤에서 벌여온 비리의 굿판은 후세 사람들에게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 소재를 남겼지만, 동시대의 국민들에게는 깊은 절망과 분노를 안겼다. 국민들은 절망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일어섰다. 분노를 삭이는 대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시민으로 거듭난 국민들은 좁은 광장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확장시켜 함께 어우러져 함께 구호를 외치고 함께 노래했다. 햇빛이 소멸된 저녁의 거리에서 바람은, 맞붙은 시민들의 등과 등 사이로 파고들지 못했다.
휴일 겨울밤의 어둠은 멀고 깊었다. 사람들은 차가운 거리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보금자리를 향해 서둘렀고, 밤마다 사람들의 지갑을 유혹하는 화려한 불빛들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감았다. 밤 빛깔은 짙게 검었다. 해가 사라진 하늘에서 햇빛을 품고 나온 별들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사람들이 이름 붙인 별들이 모두 제자리에 깨어 있었다. 멀고 깊은 곳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 광장의 촛불처럼 바람에 가끔 일렁거렸다. 달빛은 별빛을 이기지 못했다. 달은 가을에 뜨고 별은 겨울에 뜨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다. 새벽은 길고 추웠지만 태양은 물컹거리며 분명 바다를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국민들의 기억에서 그 순간의 감격이 흐릿해지자 멀쩡히 솟아 있는 태양 앞으로 서서히 먹구름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장막은 교묘히 얇아서 한 번에 한 꺼풀씩만 국민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국민들이 예전의 밝은 햇빛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어둠 속의 은밀함을 즐기는 자들은 장막 너머 흐려진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멀쩡히 떠 있는 태양을 의심하지 말라고 항변했다. 나라는 그렇게 캄캄해져 갔다. 장막 뒤에 갇힌 태양의 온기는 어둠침침해진 나라 안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차가워진 나라에서 삶은 팍팍해졌고, 국민들은 희망을 잃어 갔다. 태양은 제 스스로 먹구름을 몰아내지 못했다.

장막을 걷은 것은 촛불이었다. 한데 모인 촛불들이 피워 낸 빛은 보이지 않던 장막을 비추었다. 나라를 뒤덮은 어둠의 실체를 드러냈다. 새벽을 뚫고 올라온 태양도 조장된 어둠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는 것, 어둠을 이기는 것은 언제나 오직 한줄기 한줄기로 뭉치는 빛의 떼다. 촛불들은 차가운 나라 곳곳에서 한데 뭉쳐 어둠의 장막을 가르고 겨울밤을 지켜온 별빛들과 만났다. 지난 휴일에 찾아온 봄날 같던 태양의 눈부신 온기는 그 만남이 빚은 선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암흑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라 곳곳에 스며 있는 장막의 그림자들은 녹아 없어질 것이다. 햇빛은 구석구석을 비집고 다니며 그림자 밑에서 뿌리내린 곰팡이들까지 태워 없앨 것이다. 촛불혁명의 거대한 자산은 새로운 시대를 설계할 정치 주체를 선출해 낼 것이다. 정치는 국민들 삶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이제 다시 희망을 노래해도 좋을 때가 되었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는 저녁이면 정겨운 사람들과 도란도란 세모의 낭만을 이야기하자. 그 낭만의 일상화,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소박한 삶의 풍경과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