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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병신년 한 해를 보내며…새벽 산책과 동반(同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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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병신년 한 해를 보내며…새벽 산책과 동반(同伴)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글로벌이코노믹 노정용 기자] 앞산에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부지런한 누군가의 빗질이 새겨져 있는 새벽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해가 깨지 않은 새벽, 가시지 않은 어둠을 머금은 눈이 단정하게 포장한 숲길로 들어서는 기분은 경험자만의 것이다. 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피로감과 이불 속에 남아 있는 달콤한 게으름을 씻어내는 겨울 숲속의 공기는 오염되지 않은 눈길 위에서 더욱 청명하다.

밀려드는 싸늘한 바람에 조심스러운 적응을 마치면 폐부 안으로 하얀 숲의 맑은 기운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아무도 발을 올리지 않은 눈길 위로 첫 걸음을 내디딜 때 아직 살아 본 적 없는 새날의 감격이 왈칵 밀어닥친다. 그리하여 함박눈이 쏟아진 새벽은 특별하다.
여느 때처럼 네 발 달린 아침산책 친구가 옆에서 함께했다. ‘지교’라는 이름의 개와 아침을 걸은 지도 만 5년이 훌쩍 흘렀다. 그 세월의 아침들을 동반자 없이 걷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침은 실상 평범하기 때문이다. 새날의 기쁨을 만끽하는 특별한 아침은 손에 꼽는다. 설렐 것 없는 평범한 아침들은 흠쾌함과 거리가 있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서늘한 바람이 몰려드는 가을 숲은 을씨년스럽다. 옷을 벗은 나무들의 사이는 어느 날 갑자기 휑하니 멀어지고, 훌쩍 넓어진 길에서 바람은 거침없이 속력을 높인다. 앙상한 숲에 다시 초록빛이 돋아나고 그 빛이 숲에 가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봄비가 추적거리는 날들이 지루하게 이어져도 태양은 쉬이 달궈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거울 속에서 쑤욱 길어진 머리카락처럼 숲은 한 순간 흐드러지게 피어 텅 비었던 여백을 꽉 채워 놓는다.

빈틈마다 사람들이 메우는가 싶으면 장맛비가 퍼붓고 비가 그치면 폭염이 이어진다. 벌겋게 익은 숲의 체온은 다시 빗방울에 젖어 내려가고 기운을 잃은 나뭇잎들은 바람결에 둥지를 잃고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풍경을 즐기며 숲의 정취에 맘껏 취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입산을 멈추지 않는 힘은 동반자의 걸음에 있다. 옆에서 나란히 발자국을 새기는 동반자의 존재는 특별할 것 없는 무수한 아침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범상한 일상의 걸음걸이가 오늘도 우리에게 가능해지는 이유는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 동반자의 숨소리 덕분이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간다. 한 일도 없이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잘 간다고 올해의 끝이 아쉬워 여기저기서 모였던 사람들은 지난해의 이맘때처럼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속절없이 늙어만 간다고 머리에 때 이른 눈이 내린 이들은 한 잔의 술을 빌어 서러워했다. 누군가를 만나 소회를 털어놓는 의식을 통해 사람들은 걱정을 덜고 삶을 가볍게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슷한 의식들마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묻어나왔다.

독자 분들이여, 새해에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기 바란다. 마음에 빗장을 걸게 하는 것이 책임감 때문이든 무관심 때문이든 또 다른 이유 때문이든 닫힌 마음으로는 동행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지런히 달리는 것만으로는 차창 밖의 풍경이 꿈틀대지 않는다. 몸을 나란히 붙이고 속삭이는 이야기가 있을 때 동반은 시작된다. 진정한 동반자는 버스를 탓하지 않는다. 도로의 정체도, 날씨도, 좌석의 비좁음도 원망하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오늘처럼 눈이 내리면 다르다. 동반자의 선명한 발자국에 가슴 뭉클할 수 있는 날이다. 한해의 마지막 해넘이도, 새해의 첫 해돋이도 특별하다. 지난 절망이 거대한 산이 되어 앞을 가로막아도 그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지는 못한다. 당신의 손을 잡고 태양 앞에 함께 서 주는 그 사람이 당신의 동반자다. 그 사람은 언제나 당신 앞의 희망을 봐 주는 사람, 없는 희망도 만들어 줄 사람이다.
숲에서 내려와 돌아본 길 위에서 지교의 발자국이 나란히 따라오고 있었다. 새해에도 동반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발자국은 말하고 있었다. 지교는 ‘지극한 사귐(至交)’의 뜻이다.
노정용 기자 no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