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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생각]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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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생각]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3)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

신현정 중부대 교수
신현정 중부대 교수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현실주의자들은 즉답할 것이다. 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고. 반면에 이상주의자들은 이렇게 답할 수도 있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얼핏 들으면 이 두 개의 답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생성된 유전자적 구성에서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같은 태에서 잉태된 이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공유하는 같은 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잘 살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욕구이다.

지난 지면을 통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눈을 감고 바다를 건너는 무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포스트휴먼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근원적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도 실은 다 같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사람을 목적하기 위해서 ‘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되었고, ‘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대학을 욕망한다. 그렇다면 ‘잘 살았다’는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렇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규정할 단 하나의 진리라는 텍스트를 찾아 수 천 년, 어쩌면 수 만 년을 헤맸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그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신비를 푸는 날 우리는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의 반열에 올라 있을 테니까.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는 지구상의 인구 수 만큼이나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태도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이다. 철학자이자 프린스턴대학의 교수 피터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의 저서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The life you can save)’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독자 여러분도 같이 답해 보시기 바란다.

당신이 출근하는 길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가끔 아이들이 연못에 들어가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그 연못을 지나치다가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당신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며칠 전에 산 새 신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물론 새 양복도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며 회사에 지각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그 아이를 구하겠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래야지요.”라고 답할 것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그깟 새 구두와 양복이 망가지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실제로 당신은 그 아이를 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물건이나 사치품을 들여놓은 일에는 돈을 쓰는 것은 별로 아까워하지 않으면서도 구호단체에 기부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짝이 없기 때문이다. 싱어의 지적대로라면 지금 당신은 어쩌면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아이를 죽음에서 건지는 일보다 나의 정서적 만족을 위해 물건을 사는 쪽이 내게 더 큰 행복감을 선사한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물론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 역시 자신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큰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책임이라고 느끼는 것 역시 자신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진 아이를 지켜보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어른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비정한 사람으로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여기서 모두가 가야 할 보편적으로 옳은 길이 있고 그 길을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 역사가 실제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기보다는 실재를 바라보는 서술자의 해석일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처럼 내 삶을 규정하는 나만의 가치관이 없다면 내 삶은 나의 역사로 기록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목표하는 삶에 대한 태도 그 자체가 거의 모든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신현정 중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