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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사람 그리고 음식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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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사람 그리고 음식의 미래

김석신 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김석신 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아버지와 나와 아이들의 세상은 서로 다르다. 아버지가 살던 세상은 아날로그 일색이었지만,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에 죽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닌텐도’를 가지고 놀았으니 평생이 디지털 시대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아날로그 시대를 공유하고, 아이들과 디지털 시대를 공유하는 ‘낀’ 세대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세상은 1, 2, 4, 8, 16, 32, 64… 등비수열처럼 급경사의 곡선을 그리며 변하는데 비해, 사람은 1, 2, 3, 4, 5, 6, 7… 등차수열처럼 아주 천천히 완만한 경사의 직선을 그리며 변한다. 세상은 축지법으로 쉬지 않고 달리는데, 사람은 느릿느릿 그리고 쉬엄쉬엄 걷는다고나 할까?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과 사람 사이에 불균형이 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상이라는 회전목마가 돌고, 그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이분법적 구도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 자체는 불변한다는 전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 자체가 변한다면?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나 트랜스휴먼(transhuman)이 된다면? 아마도 이분법적 구도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세상이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기본 능력이 현재의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를 가리키고, 트랜스휴먼은 현재의 사람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과도기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포스트휴먼은 첫째, 완전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수 있고 둘째, 신체를 버리고 슈퍼컴퓨터 안의 정보 패턴으로 살기를 선택한 업로드의 형태일 수 있으며 셋째,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작은 개선들이 축적된 결과, 즉 인핸서(enhancer)일 수 있다. 인핸서의 경우에는 100% 생물학적인 존재일 수 있고, 생물학적 신체와 기계적 장치가 결합된 사이보그(cyborg)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이렇게 미래에는 사람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사람은 포스트휴먼이라는 새로운 종과 휴먼이라고 하는 보통사람으로 구분될 것이다. 아마도 이 두 존재가 공존하는(싸우지 않기를 바란다) 아주 복잡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수수께끼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새 규범이 생길 것이고, 이 규범에 따라 세상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포스트휴먼 중에서 인공지능이나 업로드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므로 음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핸서는 여전히 생물학적 존재이기 때문에(100%가 아닐지라도) 음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물론 휴먼이라는 보통사람은 미래에도 지금처럼 당연히 음식을 먹고 살 것이다. 음식은 건강수명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다양한 변화도 겪겠지만, 세상의 다른 변화보다는 상대적으로 그 변화 폭이 크지 않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규범도 보통사람을 기준으로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업로드도 보통사람과 연결하기 위해 음식에 대해 배울 것이다.

이따금 고등학교 때 배웠던 가곡 ‘옛 동산에 올라’를 흥얼거린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그렇다. 내 고교시절은 큰 소나무 없어진 옛 동산만 봐도 감회가 새롭던 아날로그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갔고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고교시절에 먹었던 짜장면을 먹는다. 비록 베인 큰 소나무 자리에 포스트휴먼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생물학적 보통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짜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
김석신 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