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문화인진흥재단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경상 작가는 1990년부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세계 100여곳을 방문해 지난 25년 간 세계문화유산을 카메라에 담아왔으며, 최근에는 한민족의 시원을 밝히기 위해 한·중·일에 흩어져 있는 단군의 흔적을 답사했습니다. 앞서 연재한 '고조선 시대 단군 이야기'에 이어 '한반도 삼한시대 이야기'를 김경상 작가에 의해 생생한 유적과 유물 사진으로 만납니다.
고자국은 그 시대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백제 지배를 받기 이전부터 굳건히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백제사를 보면 삼면의 바다와 계곡 및 산의 지형은 적의 공격이 어려우며 또한 손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6세기에 백제는 고성을 그들의 남방 최후 보루지로서 고성 상리는 만계(滿溪)로 백제군이 오랫동안 주둔하였다.
백제는 처음에 십여년간 군령(軍領)을 두고 세금을 거두었고, 그 다음 30여년간 백제의 직속령으로 임했다. 그 실례가 고성의 한기(旱岐·지배자)가 백제 성왕의 부름에 두 번이나 임하여 가야 10여국과 함께 금관가야 수복에 관해 논의를 했으며, 이때 일본서기 계체, 흠명왕(欽明王) 편에는 고성을 고차(古嵯) 또는 구차(久嵯)라 불렀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로 주민과 문화 보존을 향유할 수 있는 군사적 면에서 요충지를 차지했고 또한 해양 및 육로의 교통 발달을 들 수 있겠으며 이와 같이 견고한 자연 방벽을 갖추었기에 고성(固城)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철과 동의 채굴이 풍요로워 생활도구와 농기구들이 철제로 되었고 철제무기 및 갑옷과 토기류들이 고자국의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고성읍을 중심한 읍락(가야)과 그 주위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동외동패총, 서외오거리 주거지 발굴, 고성토성 주위의 주거 유물 등)
4~6세기 가야사회의 읍락을 고찰해 보면 집단 호수가 큰 것은 4000~5000호, 작은 것은 600~700호로 구성되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표본을 중심으로 볼 때 고자국의 호수는 고성읍 지구가 적어도 5000호 이상으로 예상되며 현재 고성읍의 호수는 1만2360호로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떠났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살기 좋은 해안이나 전답이 풍요로운 지역은 최소한 100~200호로 널리 산재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