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오래 내려야 봄비다. 소나기처럼 후다닥 왔다가는 비로는 오랫동안 추위에 웅크린 채 메말라 있던 뿌리를 해갈시키지 못한다. 목말라 있기는 흙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땅 속으로 파고든 비는 빈틈을 따라 가장 아래로 내려간다. 강하게 빨리 쏟아지는 비는 딱딱한 땅의 피부에 튕겨 땅 위의 낮은 곳을 찾아 곧장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런 비로는 봄빛이 피어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꾸준히 표피를 두드리며 풀어진 흙 속으로 스며드는 비야말로 풀과 나무의 뿌리까지 차오른다. 봄비가 다녀간 다음에야 풀과 나무에 생기가 돋고, 봄꽃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다. 한식에 봄비는 제대로 내렸다.
사위가 어둠에 갇히고 봄비 소리가 적막을 더할 때면 이은하의 ‘봄비’가 절로 떠오른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흥얼거렸던 바로 그 노래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로 시작해서 ’봄비가 되어 돌아온 사람 비가 되어 가슴 적시네‘로 끝나는 추억의 노래. 최근 TV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아버지의 빚 보증으로 인한 파산 이후 희귀 질환으로 투병하고 있는 이은하를 등장시켜 많은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이은하의 ‘봄비’를 검색해 들으며 봄풀처럼, 봄나무처럼, 봄꽃처럼 생기 있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은하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라면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무엇보다 바랐을 것이다. 건강이 첫 번째다. 건강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힘들수록 자기 몸을 아끼며 단련시켜야 한다. 세상 일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노력이 몸을 조금이라도 꿈 가까이 밀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세상은 매우 자주 노력을 배신한다. 노력에게 대가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믿어야 한다. 봄비가 땅 가장 아래부터 채우며 올라와 마침내 풀과 나무의 뿌리를 적시듯, 우리의 노력도 언젠가는 꿈이라는 나무의 뿌리에 닿을 것임을. 꿈이 마침내 활짝 꽃피울 것임을.
가슴 속으로 밤새 봄비가 내렸다. 봄은 훌쩍 푸르러질 것이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