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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장미대선; 탈출 속도와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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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장미대선; 탈출 속도와 불빛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초속 11.2㎞, 중력을 이기고 지구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지구 탈출 속도’다. 시속으로 환산하면 4만320㎞이니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1시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빠르기의 로켓 정도는 가져야 한다. 로켓이나 우주왕복선은 돈이 없어서 살 수 없고 사 봐야 딱히 갈 곳도 없어서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중력의 포로다.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에 묶인 채 지구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이 지구를, 멸종을 피하려면 100년 안에 떠나야 한다고 스티븐 호킹 박사가 경고했지만 그가 열거한 위기 요인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탈출하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우주공간의 무한함은 곧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이지만 그 무한대의 미지(未知)의 공간은 다만 미지(未至)의 영역이어서 유한한 인류를 좌절시킨다. 그 사실을 잘 아는 75세의 물리학자가 정착이 가능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한 까닭은 지구의 재생 확률을 우주 개척의 그것보다 낮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닥칠 재앙에도 아랑곳없이 환경을 파괴하며 경쟁과 쟁투를 일삼는 인류의 본성상 그에게 지구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나아가고 있음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구를 떠날 수 없다. 우리는 지구 안에 갇혀 있다. 전 인류적 관점에서 탈출 속도는 이미 해결되었다. 문제는 탈출 방향이다. 지구 밖에서, 인류는 갈 곳이 없다. 지구 안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한다. 지구 동쪽 끝의 반도 남쪽에 우리의 대부분은 틀어박혀 있다. 이곳에서 삶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중력을 대신해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긴다. 이론적으로 탈출은 언제든 가능하다. 방향은 정하기 나름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상의 끈에 포박되어 있다.

지난 9년 동안, 이 땅에 멀쩡히 살아 있던 경제와 민주주의가 동반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의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이 땅에 작용하는 중력을 거스를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헬’이 된 이 땅을 등질 수 없었다. 어느 날, 이 땅 안에 너무도 뚜렷해진 삶의 불공평성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과 분야를 망라한 적폐 탓임이 선명하게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상과 단절할 힘이 생기는 대로 다른 곳으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의 힘을 한데 모아 이 땅의 운명을 바꾸는 길을 사람들은 선택했다. 모여서, 사람들은 광장의 밤하늘에 촛불을 피워 올렸다. 모이고 모인 촛불이 밝힌 꽃빛 덕에 이 땅에는 다시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고, 생명력 가득한 5월의 신록 속에서 우리의 터전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과 만나고 있다. 지구 속 우리만의 작은 지구는 탈출하지 않아도 되는 땅으로 회복되려 하고 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후손이 사회 기득권층이 되어 권력을 누리고 사는 나라, 해방된 조국을 찬탈한 독재자들에 부역을 이어간 그들이 민주주의의 피 위에 맺힌 열매를 독식해 온 나라, 자본이 사람을 지배하고 출신 성분이 진로를 결정하는 나라, 불의가 정의를 비웃고 거짓이 진실을 가리는 나라는 저물고 새로운 나라가 떠오르려 하고 있다. 동서로 갈라졌던 나라는 엉켜 붙고 세대로 나뉘었던 나라는 뒤섞이려 하고 있다. 오로지 촛불의 힘이다.

그 시절은 떠나보내야 한다. 이 땅에서 날마다 쏟아졌던 이야기들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에 불덩이가 이글거리던 시절과는 작별해야 한다. 발바닥에 와 닿는 일상이라는 중력의 무게감이 기분 좋아지는 나라, 탈출 속도를 잊고 살아도 좋은 그 나라를 향해 불빛 같은 한 표를 켜자.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