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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잊지 말아요, 우리…"영웅은 시대의 사람들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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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잊지 말아요, 우리…"영웅은 시대의 사람들이 만든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글로벌이코노믹 노정용 기자]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우측 편으로 뚫린 골목 어느 곳으로든 접어들면 이곳에 당도한다.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앞에 서촌이라는 두 글자를 굳이 더하면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까.

유명하다는 계단집을 찾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집에 사람들이 낮부터 그득했다. 일요일이라서 한산한 술집들을 외면하고 굳이 번호표까지 받아가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잠시 지켜보았다. 신선해 보이는 가리비가 입맛을 당겼다. 바람이 시원한 야외 테이블을 떠나는 사람들에 이어 재빨리 자리를 차지했건만 우리보다 앞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단체객들에 밀려 엉덩이를 일으켰다.
전통 막걸리와 함께 전을 먹을까, 다채로운 주꾸미 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일까, 장어에 아무 술이나 곁들일까 하다가 눈에 들어온 흑색 3층 건물 밖에 자리를 잡았다. 4명의 젊은 알바 청춘이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다가 우리를 맞았다. 휴일이라도 텅 빈 가게 안을 바라볼 사장의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까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며 문어숙회와 찬 소주를 시켰다.

담백한 백김치와 신선함이 이를 데 없는 고소한 부추, 깊은 맛을 간직한 오이 냉채와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청양고추, 그리고 구색을 갖춘 반찬들까지 기대하지 않았던 감칠맛이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휴일의 여유를 즐겼다. 우습게도, 남자 둘이 만나 삼계탕을 먹고, 배역에 더 이상 완벽하게 어울릴 수 없다는 여주인공의 화려한 액션 신이 돋보이는 영화 ‘원더우먼’을 보고 나서 발길을 향한 곳이 도로와 도로를 건너 효자동 골목들과 이어진 세종마을이었다.

골목 안으로 내려온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전깃줄마다 매달린 노란색 전통 조명들이 켜진 후, 눈에 띄게 불어난 사람들로 골목 안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강남역과 홍대입구역 인근의 현대적 정취와는 다르게, 지나간 시절의 정겨운 풍경을 띈 채 여러 세대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술집이 어우러진 골목 안에서 내일에 대한 걱정을 잊은 사람들은 어울려 먹고 마셨다. 살기 위해 먹었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오래된 골목은 시대에 걸맞은 문화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반겨 품었다. 조선시대의 도성 안에서 사람들을 맞는 방식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 방식은 세대와 국적과 테마를 맘껏 아우르고 있어서 자유로워 보였다. 현충일 앞 일요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젊음을 조국에 바친 순국선열들이 바라던 세상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어린 시절 TV 속 만화 중에 ‘수퍼 특공대’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수퍼맨, 배트맨 앤 로빈, 아쿠아맨, 후레쉬맨, 그리고 원더우먼의 히어로 연합체의 활약상은 어린 마음에도 팍팍한 일상에서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구들을 해방시켜 줄 영웅을 꿈꾸게 했다. 빨간 보자기를 두르고 담벼락에 올라 논바닥으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빨간 다라이에 얼굴을 묻고 숨 오래 참는 시합도 벌이고, 도화지를 오려 시커멓게 칠한 가면을 쓰고 달리기도 하면서 정의의 실현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되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던 추억들을 갖고 있는가. 오래 전 이야기 같지만 바로 엊그제 우리에게 있었던 일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는가.

사는 게 힘들다고 경제에 달통했다는 기업가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평생 밥 한 번, 설거지 한 번 제 손으로 하지 않았을 사람에게 ‘불쌍하다’는 이유로 표를 던져주며 많은 사람들이 흐뭇해했던 날이 바로 얼마 전이다. 신이 강림해 스크린 속 지옥 같은 인간 세상을 구원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명을 기려 조성한 골목의 휴일에 시대를 건너온 성군의 사랑이 넘쳐흐를지 몰라도, 일찍 떠오른 달 아래에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사람들이 만든다. 동시대인들이 힘을 모아 등장시키는 영웅은 저마다의 내면에서 가장 강하게 꿈틀거리는 욕망의 집합체다. 그것의 천박함과 그것의 위대함이 세상을 지옥으로도 살맛나는 곳으로도 만든다.
세종 임금도, 달을 보면 떠오르는 그도, 그 시절 우리와 지금 우리 위대함의 상징이다. 제아무리 취해도 우리의 위대함을, 우리는 두 번 다시 잊지 말아야 한다.

노정용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