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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탈출 일념으로 떠나 주경야독 '제2의 인생'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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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탈출 일념으로 떠나 주경야독 '제2의 인생' 열어

문재인 대통령 '애국자 발언'…파독 광부‧간호사의 '어제와 오늘'

[글로벌이코노믹 노정용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애국’의 의미를 강조하며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준 분들을 ‘애국자’로 불렀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가 그 주인공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산업화의 역군들이다. 파독 광부 출신으로 낮에는 어두운 탄광 속에서 일하고 밤에는 도서관에서 공부의 열정을 불태운 분이 계시다.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77)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인생사를 통해 파독 광부의 눈물겨운 삶을 조명한다. <편집자 주>

소 판 돈으로 독일행 경비 마련


생지옥 같은 탄광서 3년 버텨

사고당해 한동안 병원 신세


가장 현대화된 독일 막장 채탄 기계.이미지 확대보기
가장 현대화된 독일 막장 채탄 기계.

지독히도 그는 가난했다. 전라북도 장수군 지리산 산골에서 태어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어야 했고 가출하다시피 전주로 나와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신문배달, 막노동, 자장면 한 그릇을 위한 수혈, 빈대가 우글거리는 자취방, 늘 쉽지 않은 삶은 운명처럼 등장한 사람들로 인해 기적을 일으켰다.

가난 속에서도 대단한 교육열을 가진 어머니가 시작이었다. 서울 막노동으로 이끈 육촌 조카와 그 현장에서 만나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한양대 대학생,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 독일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것을 설득한 수양 엄마. 그의 인생은 인연이 만든 기적이었다.

공사장에서 같이 일하던 대학생이 ‘파독 광부’ 이야기를 꺼냈다. 파독광부 모집 공고가 신문에 실리고 많은 이들이 신청하러 몰려들 때였다. 광부 월급이 당시 국내 공무원 월급의 10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는 파독광부를 가난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문제는 자격 요건 중 1년 이상 광부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방법은 딱 하나. 경력증명서 위조였다. 당시 증명서 위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광부 경력이 있는 사람만을 모집하는데 젊은이 수천 명이 몰렸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증명서를 만들려면 브로커에게 많은 돈을 줘야 했다. 형님은 전 재산이나 다름이 없는 소 판 돈을 그에게 주었다. 뒤돌아 보면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는 1964년 1차 2진 파독광부 시험에 합격한다.

1964년 10월 5일.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었다. 그는 같은 기수 429명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독일행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일한 곳은 독일 아헨(Aachen) 지역 메르크슈타인(Merkstein) 아돌프 탄광이었다.
지하 1000m를 내려가 거기서 3~4㎞를 더 이동해야 작업장이 나왔다. 빛이 들지 않는 암흑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8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지열은 섭씨 36도에 육박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너무 더워서 마스크를 쓰지도 못할 정도였다.

강원도 장성에서 독일에 건너가기 전 파독광부들이 광산 실습을 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강원도 장성에서 독일에 건너가기 전 파독광부들이 광산 실습을 하고 있다.

고된 타국 생활에 가족과 고향 생각이 절로 났다.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힘들었던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동료를 잃었다. 천장 붕괴 사고였다. 죽은 동료는 유학을 목적으로 왔다고 했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고 다리를 다치는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종종 터졌다. 그도 사고를 피하지 못했다. 독일에 와 8개월이 지났을 무렵(65년 6월)에 바윗더미가 무너져 왼손을 짓이기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출신 수양 어머니


"남아서 공부해라" 귀국 만류


결국 독일서 교육학 박사 취득


한 달 동안 병상 신세를 져야 했고 지금도 후유증으로 왼손에 힘을 주지 못한다. 광부를 하며 생긴 직업병이라고나 할까. 그는 지금도 고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면 웬만해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더디게만 흘러가던 광산에서의 3년도 그렇게 흘러 종착점에 이르렀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것이다.

지하 수천 미터에서 막장 석탄 채탄준비를 위한 갱도 굴진 작업
지하 수천 미터에서 막장 석탄 채탄준비를 위한 갱도 굴진 작업

그는 독일 생활을 하며 썼던 모든 짐을 한국 가족에게 보냈다. 드디어 귀국 날, 뒤셀도르프 공항에 탑승수속도 마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일만 남았다. 오스트리아 출신 로즈마리 부인과 그의 딸이 공항에 나왔다. 광부 계약 기간이 1년도 남지 않은 1967년 독일에서 만난 가족이었다. 특히 당시 나이가 예순이었던 로즈마리 부인은 그가 양어머니로 모실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100㎞ 떨어진 에슈바일러(Eschweiler)에서 그의 한국행을 말리러 온 거였다.

로즈마리 부인은 그에게 “독일에서 광부로만 지내다가 가는 게 무슨 의미냐”며 남아서 좀 더 공부를 하라고 했다. 평소 그의 꿈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걸 알고 계셨던 수양어머니는 독일에서 계속 남기를 권유했다. 결국 그는 남기로 결심한다.

지하 천미터에 막장에서 캐어진 석탄을 갱도를 통해 지상으로 운반 하는 과정
지하 천미터에 막장에서 캐어진 석탄을 갱도를 통해 지상으로 운반 하는 과정

그는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마음 한 편에는 독일 대학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공항까지 가놓고서는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지금까지도 나 스스로 이해가 안 가요”라고 회고했다.

그는 로즈마리 부인의 도움을 받아 1968년 4월에 아헨교원대에 입학한다. 이곳에는 또 다른 조력자가 있었다. 당시 사범대 학장으로 있던 푀겔러 (Poeggeler)교수다. 그 교수의 허락으로 외국인 신분이었지만 입학할 수 있었고 대학도서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툰 독일어 실력으로 전문용어가 오가는 수업을 따라가기 벅찼다. 성적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정붙일 한국인은 찾아볼 수 없는 학교생활은 그에게 외로움만 커지게 했다. 학교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누구의 시선도 느낄 수 없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1971년 독일에 간호학생으로 유학 온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를 계기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맞벌이를 하면서 형편도 나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첫 딸을 질식사로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공부와 일 때문에 너무 바빠 남의 손에 맡기고 석 달이 흘렀을 때였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아이에 대한 마음의 빚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슴에 아이를 묻은 채 공부에 열중했다. 남들은 4년 걸릴 대학 공부를 6년 만에 끝내고 푀겔러 교수의 권유로 석•박사 학위에 도전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11년 만에 독일 교육학 박사가 되었고 몇 달 후 그는 한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영구 귀국했다.

[인터뷰] 권이종 파독근로자 기념관 관장(ADRF 회장)

"빈곤아동 위한 교육 지원 온힘"


"독일 생활은 가난이 준 선물"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

“제가 독일에서 배운 것을 이제는 마음껏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 난민교육후원회(ADRF)의 회장을 맡아 ‘교육이 희망이다’라는 슬로건처럼 빈곤아동들을 위한 학교교육과 인성교육 지원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권이종 회장은 지금도 가끔 파독 광부 시절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럴 때면 얼굴에 눈물과 미소가 함께 번진다.

“예전에 내가 일했던 독일 탄광에 다녀왔어요.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라만 보는데도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해요. 가난이 준 선물이라고. 파독 광부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권이종 ADRF회장이 결연 아동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권이종 ADRF회장이 결연 아동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권 회장은 마지막으로 문재인 정부에 다음과 같이 간곡한 요청을 했다.

첫째, 2만명의 파독 근로자 출신들이 물질적인 보상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보상을 받길 원한다.

둘째, 다들 나이가 들어 죽는 경우가 많다. 죽어도 갈 곳이 없는 분들이 많다. 때문에 그들을 위한 추모 공원을 만들어 달라.

셋째, 양재에 소재한 파독근로자 기념관을 운영하기 위해 운영비•인건비 지원이 필요하다.

넷째, 진폐증 환자에 대한 전폭적인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 등이다.


노정용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