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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동기시대 최상위 취락으로서의 송국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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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동기시대 최상위 취락으로서의 송국리유적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102)]

송국리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이미지 확대보기
송국리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주거, 의례・저장・생산・무덤(매장)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한 공간으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이 등장한 것은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수전 농경을 생계기반으로 삼아 정주생활(定住生活)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취락의 전형적인 모습은 취락지 전체가 발굴조사된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상위 권력을 가진 수장의 주도하에 토목공사를 벌여 취락의 터를 닦고 그 위에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한 의례공간을 마련하고, 대지를 관통하여 연결통로를 건설한 취락 구조는 송국리유적의 독특한 면모다.
이러한 취락의 조성을 주도한 수장은 유적에서 가장 조망 좋은 자리에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검과 함께 묻혔다. 송국리유적 인근의 산직리 고인돌도 이러한 기획의 산물이 아닐까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인돌이 초대형인 점뿐 아니라 그 위치가 송국리 취락이 자리잡은 구릉의 최말단부로서, 가시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모한 추정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최상위 취락으로서의 송국리유적의 실체는, 일본의 요시노가리유적에서 보듯이 수장과 공동체 구성원의 주거공간, 수장과 의례공간, 생산물의 저장공간, 매장공간, 목책 환호 등 구획 및 방어시설이 기획 조성된 모습으로 밝혀질 것이다.


김경상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