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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옥구반도 전체가 넓은 갈대밭의 갯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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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옥구반도 전체가 넓은 갈대밭의 갯벌이었다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108)]



군산은 삼한시대의 마한과 백제의 영토로서 옥구반도 전체가 모두 넓은 갈대밭의 갯벌이었다. 이 시기부터 금강 변에 입지한 높이 50~200m의 구릉들은 군산의 항구와 마을의 입지들을 결정해왔다.
먼저 백제인들은 월명산의 동쪽으로 현재 수덕산 공원인 수덕산(水德山)/수륙산(水陸山)의 정상부에서 금강과 서해를 바라보며 하늘과 바다에 마을의 안녕과 선박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수륙제(水陸第)’를 지냈다.

조선은 이곳의 항구를 ‘옥구진(沃溝鎭)’이라 불렀으며 이후 군산창(群山倉)을 조성하고 ‘군산진(群山鎭)’으로 개명하였다.

군산 신월리유적에서 출토된 곱옥 구슬목걸이, 군산대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군산 신월리유적에서 출토된 곱옥 구슬목걸이, 군산대박물관

한반도의 내륙으로부터 서해안의 진입부인 오성산(五聖山, 227m)과 멀리 서해를 볼 수 있는 화산/월명산(月明山)은 각각 군산의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정의했다.

금강 변의 오성산의 ‘서포(西浦)/서시포(서포리)’와 망경산(望景山)의 ‘나포(羅浦, 나포면 옥곤리)’와 진성창(鎭城倉)은 조운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내륙의 금성산에서 흘러 나온 경포천(京浦川)의 하구에는 ‘죽성(竹城)’이란 대나무숲을 중심으로 ‘경포(京浦)/서래포구’와 ‘죽성포구/째보선창’이 역시 항구로 기능했다.

인접한 미면(米面)은 고려후기부터 백염(白鹽)의 생산지로서 경장동(京場洞)의 ‘경장장(설애/서래장터)’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옥구반도의 행정거점은 북방산과 취성산을 모산으로 두고 조성된 ‘임피(臨陂)’, 그리고 서남쪽의 영병산(領兵山)/사자암산(獅子岩山)과 광월산(光月山)을 두고 조성된 ‘옥구(沃溝)’였다.

또한 내륙의 금성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평사들의 마을들은 경포천을 통해 수로로 금강과 만경강으로 연결되었다. 흥미롭게도 고대의 금강은 현재 수계와는 매우 달리, 경장동과 평사들을 관통해서 남쪽으로 당북리와 금성리를 지나 만경강으로 흘렀다는 주장도 있다.


김경상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