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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자의 겜문학] '운빨'로 흥한 '배틀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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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자의 겜문학] '운빨'로 흥한 '배틀그라운드'

[글로벌이코노믹 신진섭 기자] '신기자의 겜문학(게임+인문학)'은 글로벌이코노믹 산업부 신진섭 기자가 매주 게임을 선정해 그 안에 숨어있는 인문학 요소를 이야기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화제의 게임, 고전 게임 등 다양한 게임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독자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우연과 행운의 신 '포튜나(Fortuna)'와 블루홀 '배틀그라운드' 대표 이미지 합성. 사진=노혜림 디자이너이미지 확대보기
우연과 행운의 신 '포튜나(Fortuna)'와 블루홀 '배틀그라운드' 대표 이미지 합성. 사진=노혜림 디자이너

지도 어딘가로 낙하산을 펼친다. 정신없이 아이템을 줍는다. 상대를 제압하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배틀그라운드'는 이렇듯 단순한 게임이다. 그런데 왜 재미있을까.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게임이 1000만 장이나 팔리고 '도타'를 제치고 스팀 동시 접속자 수 1위를 차지했다. 기자는 그 이유를 운빨과 실력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았다.

일반적인 FPS(1인칭 슈팅 게임)은 운이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승리의 방정식은 간단하다. 맵을 잘 외우고, 총을 잘 쏘면 이긴다. 초보유저가 고수를 제치고 승리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대부분의 FPS게임은 편을 두 개로 갈라서 승부를 겨루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우리 편에 고수가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승부는 사실상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정해진다.

'어디로 가야 하오'. 내 주위에 벌떼처럼 펴진 낙하산을 보며 유저의 심정은 복잡해진다.이미지 확대보기
'어디로 가야 하오'. 내 주위에 벌떼처럼 펴진 낙하산을 보며 유저의 심정은 복잡해진다.

배틀그라운드는 우연적인 요소 투성이다. 어떤 지역에 좋은 아이템이 있을지 낙하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유저들의 목을 죄여오는 자기장 설정도 마찬가지다. 운이 좋다면 처음 시작지점에서 눌러앉아도 10위권에 들지만 운이 없다면 경기 내내 섬을 뛰어다니는 일명 '이봉주 온라인'이 불가피하다. 심지어 총기 발사에도 RNG(난수 발생)이 적용돼 어떤 반동이 생길지 쏘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보급품의 위치도 매판 다르다.

우연이란 변수를 뜻한다. 변수가 많을수록 다양한 게임 플레이가 발생한다. 변수가 많은 게임은 매 판마다 다른 경험을 유저에게 제공한다. 단순하지만 질리지 않는 배틀그라운드의 매력은 ‘우연’에 있다. 변수들이 조합되며 매판마다 다양한 '앙상블'이 탄생한다. 물론 우연적인 요소만 마구잡이로 집어넣는다고 좋은 게임이 되지 않는다. 재화가 걸려있지 않으면 주사위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다. 운만 있을 뿐 재미는 없다.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의 . 놀이론의 고전적인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YES24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의 . 놀이론의 고전적인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YES24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그의 저서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근본적인 요소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눴다. 실력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경쟁적 놀이를 '아곤', 주사위와 같이 운에 달린 놀이를 '알레아', 대상을 흉내 내는 놀이를 '미미크리', 감정을 고조시키는 놀이기구 등을 '일링크스'로 분류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절묘하게 조화시킬 때 좋은 게임이 탄생한다. 배틀그라운드가 그렇다.

배틀그라운드는 ‘아곤’이 강한 게임이지만 ‘알레아’를 배제하지 않는다. 100명 중 30등까지 진입하는 데는 근처 차량의 유무, 초반 아이템 획득 정도, 자기장의 위치 등 우연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10위권 이상으로 진입하려면 실력, 즉 ‘아곤’이 뒷받침되야 한다. 우연적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다양하다. 고수라면 지형을 외워 초보 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 양질의 아이템을 수급할 수 있다. 아곤이 게임을 질리지 않게 만든다면 알레아는 게임의 깊이를 만든다.

물론 '딩셉션'이라면 얘기는 조금 다르다. 몽골인 수준의 시력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사진=유튜브 캡처
물론 '딩셉션'이라면 얘기는 조금 다르다. 몽골인 수준의 시력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사진=유튜브 캡처

그렇다고 고수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00명이 동시에 생존투쟁을 펼치는 이 게임에서 제 아무리 고수라도 매번 1등을 차지할 수는 없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초보들의 공격에 고수도 심심치 않게 쓰러진다. 지형이 타 FPS에 비해 무척 넓어 1대 1 보다는 1대 다수, 다수 대 다수의 전투가 빈번하다. 초보가 고수를 꺾는 역전의 가능성은 낙하산을 펼칠 때마다 느껴지는 설렘과 기대의 근원이다.초보도, 고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실력에 관계없이 모든 유저들이 매 경기, 매 전투마다 강력한 감정의 동요 ‘일링크스’가 발생한다.

자기장을 피해 중앙으로 뛰자니 뒤편에 숨어있는 적들의 총알이 무섭고, 안 뛰자니 감전사(일명 가로쉬 엔딩)이 확실하다. 자기장의 신이 굽어살피길 바라는 수밖에.이미지 확대보기
자기장을 피해 중앙으로 뛰자니 뒤편에 숨어있는 적들의 총알이 무섭고, 안 뛰자니 감전사(일명 가로쉬 엔딩)이 확실하다. 자기장의 신이 굽어살피길 바라는 수밖에.

자기장은 아곤과 알레아가 가장 절묘하게 섞인 장치이다. 임의적으로 설정되지만 동시에 게임 플레이 시간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만약 자기장이 없었다면 생존의 재미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자기장 덕분에 최대 3~40분 가량 생존해야 한다는 규칙(아곤)이 정해져있으므로 기다림(일명 존버)의 경험은 목표에 다다르고 있다는 만족감으로 유저들에게 돌아온다. 공포게임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등 숨바꼭질류 게임들에게서나 찾을 수 있던 재미 요소다. 자기장이 없었다면 배틀그라운드가 '플레이 타임이 길어질수록', '숨어 있어도' 재미있는 게임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엘리트 스나이퍼' 등 FPS 게임에 이미 탄도학이 구현된 바 있다. 그렇다고 배틀그라운드의 탄도학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100명이 동시 전투를 벌이는 게임에 탄도학이 적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스럽다. 사진=http://iroke91.tistory.com/18이미지 확대보기
물론 '엘리트 스나이퍼' 등 FPS 게임에 이미 탄도학이 구현된 바 있다. 그렇다고 배틀그라운드의 탄도학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100명이 동시 전투를 벌이는 게임에 탄도학이 적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스럽다. 사진=http://iroke91.tistory.com/18

총알 궤적이 달라지는 탄도학, 지형지물을 이용한 은폐엄폐 등 요소는 몰입감, 즉 ‘미미크리’를 강화한다. 물론 현실과는 꽤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게이머에게 중요한 건 현실과 동일한 게임이 아니라 현실과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세계관이 잘 구축된 롤 플레잉 게임에서 유저들이 자신과 캐릭터를 동일시하기 쉽듯이 FPS에서는 현실과 유사한 전투 방식이 몰입감을 상승시킨다. 브랜든 그린은 아케이드적 면모가 강했던 전작 'H1Z1'에 비해 배틀그라운드에서 '리얼함'을 구현하는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틀그라운드는 리얼 FPS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성 자체는 RPG에 가깝다. 팬티 한 장 걸치고 땅에 내린 캐릭터가 적을 해치우고(Player Killing) 아이템을 획득하며 그럴싸한 군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성장에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리는 RPG와 달리 배틀그라운드는 수십분안에 성장의 재미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어쩐지 먹어두면 든든한 8광. 배틀그라운드에서는 AR(Auto Rifle 자동소총)이 8광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3렙 뚝배기도 마찬가지. 사진=글로벌이코노믹
어쩐지 먹어두면 든든한 8광. 배틀그라운드에서는 AR(Auto Rifle 자동소총)이 8광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3렙 뚝배기도 마찬가지. 사진=글로벌이코노믹

배틀그라운드는 총을 들고 벌이는 현대 배경의 RPG이며 공포게임의 재미 요소와 레이싱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탄생했다. 여기에 운과 실력적 요소의 적절한 조화는 게임의 생명력을 증가시키는 조미료로 작용한다. 배틀그라운드를 플레이할때마다 48장의 카드로 구성된 국민 놀이 '고스톱'이 생각난다. 낼까 말까(쏠까 말까), 먹을까 말까, 어떤 조합이 좋을까. 두 게임에 사용되는 서술어는 이렇듯 비슷하다. 두 게임 모두 '운빨'로 흥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섬 안에서, 화투판에서 수십 만 명이 운을 극복하기 위해 외쳐 될 것이다. 야, 갈까(고), 말까(스톱).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