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유적지 심지어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길게 줄을 서면서도 천하태평의 표정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에는 모두 대한민국 꼬레아가 만든 판도라 상자를 가지고 쉴 틈 없이 사색이 아닌 검색을 빠르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 여정지인 이탈리아에서 지금 필자는 피렌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곳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펜을 잡았다. 피렌체는 세계적 거장들을 20명 이상이나 배출했다. 세계 3대 박물관은 대영, 루브르, 바티칸 박물관이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다. 이들이 조합하여 만든 최고의 백미는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이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제작에 몰두하였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쓰러져 하인의 등에 업혀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당시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 초인적인 열정과 집념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또는 천재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고 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같은 작품을 보면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함 앞에서 경탄보다 강한 시기와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피에타는 1547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단과 계속을 반복하다 숨을 거두었다. 후세들은 미완성이라고 평가하지만 미완성이 아닌 것 같았다. 조각 작업은 “필요한 부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다”는 명언처럼 덜 깎아 낸 돌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조각들은 인간과 숙명적인 관계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예수와 성모가 한 인물처럼 조각되어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 같아 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의 근교 카센티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영특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학업’에 집중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당시 분위기로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는 매를 때려가며 훈육을 했지만 아들의 외통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천재는 일찍 발견되어 13세 때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게 되는 데,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90년 생애는 번민과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위대한 작품을 통하여 남은 우리는 환희와 희망 그리고 인류애를 보고 감동을 한다. 세월 앞에서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미켈란젤로 언덕에 펼쳐진 끝없는 야경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숙소로 옮겼다. 잠을 청했지만 5년 전 악몽이 되살아났다. 미칠 것만 같았다. 단숨에 노트북을 켜고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1부와 2부를 연이어 들이 마신 후에야 깊은 숙면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아! 피렌체여! 영원하라.
한대규 한전 강남지사 부장(전 인재개발원 책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