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을 뒤흔든 지진으로 수능이 한 주 연기되었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철학이 우리 사회의 온도를 높여 주는 따뜻한 경험을 공유했다. 세월호의 마지막 장례식에서 함께 울면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소수를 배려하여 공정성을 지키는 것이 공공을 위한 참 가치임을 깨달았다. 겨울이 와도 우리의 세상이 결코 차갑게 얼어붙지 않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절친한 선배의 둘째 딸은 수능을 치르기로 예정된 날 저녁에 그간 공부했던 모든 책을 내다버리고 일찍 잠을 청했다. 시험일이 연기되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그간의 공부로 충분하다며 정부의 결정이 옳다고 지지를 보냈다. 선배 역시 시험공부의 시간은 모두 끝났으니 마음껏 놀고 편안히 쉬며 시험일을 기다리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대학입학시험이 이후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부모와 경쟁은 공정해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딸은 그렇게 긴장감과 초조함 대신 난데없이 생겨난 여유를 축복처럼 즐겼다.
학부모들과 아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예고 없이 들이닥칠 지라도 이번처럼 정부의 배려가 자신들에게 포근하게 미칠 것임을. 그리하여 올해의 수능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굳건히 지탱할 사람의 철학과 사람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싹튼 시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듯하다. 왜 아니겠는가? 특수를 맞아 목돈을 긁으려는 학원가의 탐욕과 자식들을 더 좋은 대학으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의 사욕이 여전히 이 사회에 남아 있는 이기심의 잔재를 드러내지만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의 도도한 흐름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 아닌가. 세상은 눈부시도록 빠르게 바뀌고 있는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바삐 새로운 곳을 향해 달려가는데 구시대의 유산에 발목이 잡혀 있는 언론과 옛사람들은 아직도 사회적 갈등을 키우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갈라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익을 창출했던 갈등과 분열의 메커니즘이 더는 미래의 수익모델이 될 수 없음을 통찰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한계다. 국민들의 눈높이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를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오만함 탓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어도 차마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국민 의식의 성장과 시대정신의 도래 앞에서 당혹해 하는 그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긴 겨울이 우리 앞에서 문을 열었다. 문 안쪽의 드넓은 광장 곳곳에서 난로들이 온기를 발산하고 있다. 광장 어디를 걷든지 우리의 몸을 녹여줄 정겨운 난로들이다. 이제 가슴 시리던 시대의 겨울은 막을 내리고 체온과 체온이 만나 난로가 되는 새로운 시대의 겨울이 막을 올리고 있다. 그 풍경이 정겨워 겨울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