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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워마드는 왜 산으로 가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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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워마드는 왜 산으로 가게 됐을까

산업부 신진섭 기자.
산업부 신진섭 기자.
[글로벌이코노믹 신진섭 기자] 자칭 여성혐오 반대 인터넷 사이트 ‘워마드’에서 최근 ‘호주 어린이 성폭행’ 논란이 벌어졌다. 한 회원이 수면제가 든 주스를 어린이에게 건넨 뒤 성폭행했다고 적은 것이다. 글쓴이는 피해 어린이 추정 사진과 함께 7편의 동영상이 담긴 컴퓨터 화면 캡처 사진도 공개했다. 내용만 보자면 워마드는 그들이 공공연히 혐오하는 ‘일간 베스트’의 악행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일베의 혐오를 ‘미러링(반사)’하는 워마드의 전략은 오히려 그들을 혐오의 산 꼭대기로 올려 놓은 듯 하다.

미러링이란 전략을 이해하려면 먼저 미러링의 뿌리부터 알아야 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책들에서 모든 것은 시작됐다. 책 속, 가상의 대륙인 이갈리아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이 정반대다. 남자는 고환을 감추는 속옷인 ‘페호’(브라자의 미러링)를 입고 여자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잠수부와 같은 육체적인 노동은 오직 여자에게만 허락돼있고 잠수부의 꿈을 꾸는 남자는 주변의 멸시와 조롱을 견뎌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남성들은 자신들 또한 남성 우월주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또 반성했다. 미러링은 일종의 충격요법의 역할을 수행한다. 남의 입장이 돼 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여성이 겪는 차별을 남성에게 그대로 전이시키는 서사구조는 소수자가 돼는 유사경험을 제공한다. 자칭 여성 단체 ‘메갈리아’의 이름도 이 책에서 유래된다.
<이갈리아의 딸> 역시 출간당시 많은 반발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여성차별을 고발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인정 받은 것이다. 현재 미러링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몇 몇 여성단체 역시도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정당한 이에게 쏟아지는 무지한 자들의 비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갈리아의 미러링과 워마드의 미러링은 결코 같지 않다. 그것이 그들이 욕먹는 이유다.

현재 여성단체들의 미러링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 그들의 반사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일반 남성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러링이 성공하려면 차별자의 언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정반대로 반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반사대상은 다름 아닌 일베의 언어였다. ~노, 이기야, 재기, 씹치남 등은 일베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언어들이다.

문제는 일베의 언어가 일반 남성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남성 중에서도 비주류이며 가장 극단의 차별적 언어를 사용하는 부류다. 그들의 언어를 미러링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여자 일베의 언어를 탄생시키겠다는 말이다. 반사할 대상 자체가 잘못되면서 대다수의 남성들은 여성단체의 미러링에서 자신에게 내재된 우월의식 혹은 여성차별을 깨우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 그들의 미러링이 겨냥하는 것은 일베이지 일반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미러링은 또 다른 억압을 낳는다. 모든 남자는 일베 수준이며 따라서 너희도 가해자라는 프레임은 이렇게 탄생한다. 양자간에 대화가 될 리 없다. 한쪽에선 ‘잠재적 가해자’라고 포화를 쏟아대지만 정작 말의 포화를 견뎌야 하는 대다수 남자들은 황당하다. ‘난 아닌데’라는 남자들의 변명은 그래서 정당하다. 일베가 아니니까 일베를 향한 미러링에서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느껴지는 건 함부로 자신을 재단하는 여성단체의 언어에 대한 분노 뿐이다.

둘째는 미러링의 방법론적 문제다. 다시 이갈리아의 딸로 돌아가보자. 저자는 혐오와 멸시가 발생하는 일상적 순간마다 여자와 남자를 의도적으로 바꿔 쓴다. 새로운 혐오의 순간을 창작하지는 않는다. 없지도 않은 혐오를 만들어내서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우면 애초에 기대했던 미러링의 효과와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몇 몇 여성단체들의 말하는 미러링은 어떤가. 그들이 반사시키고 있는 건 은폐돼 있는 여성 혐오의 일상성이 아니다. 정확히 어떻게 무엇을 반사시키겠다는 방법, 더 나아가 의지조차 엿보이지 않는다.

‘호주 어린이 성폭행’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익힌다. 체계적인 미러링 방법론이 마련돼 있지 않으니, 또 그런 골치 아픈 페미니즘은 싫으니 혐오의 언어가 아닌 혐오 자체를 반복 재생산 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혐오 받았다고 느끼니 남을 혐오하는 것’이 미러링이 됐다. 이건 미러링이 아니다. 그저 여자 일베다.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풀지 못해 안달난 키보드 워리어(우리가 일베에서 수도 없이 체험해본)다. 혐오를 쏟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미러링 자체의 무지를 스스로 고백하는 촌극이다.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운동(그것을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인지도 모호하며 폭력의 대상은 한국 남자 전체이다. 개별성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들에게는 룰이 없다. 스스로 소수자임을 자칭하면서 LGBT를 혐오하며, 남성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혐오테러를 감행한다.

미러링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페미니즘의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뜨거웠던 시기는 돌아보면 찾기 힘들다.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의 운동은 천천히 그러나 내부적으로 격렬한 토론을 통해서 진행돼왔다. 그만큼 속도는 느렸으나 안정성이 뛰어난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러링은 급진적이었다. 그만큼 충돌과 반목을 불러왔으나 아주 빠르게 남성사회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벌집을 들쑤시니 벌이 튀어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요즘은 말벌이 아니라 꿀벌 일벌 다 가리지 않고 에프킬라에 라이터 불을 붙여 화염방사질 중이다. 이런 미러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남성우월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거다.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기도 사실 민망한 수준이다. 범죄와 사회운동은 분명 구분돼야 한다. 여기저기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이퀄리스트’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