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실리콘밸리 해부] ② 4차 산업혁명 최초의 발상지… 그 역사의 현장

공유
0

[김대호 실리콘밸리 해부] ② 4차 산업혁명 최초의 발상지… 그 역사의 현장

실리콘밸리는 휴렛패커드(HP)라는 전자업체로 부터 시작됐다. HP의 첫 사무실이 있던 팰러앨토 지역의 한 차고 앞에는 실리콘밸리 발상지라는  동판이 서있다. 기획시리즈 김대호 박사의 실리콘 밸리 이야기. 그 발상지를 찾아서.김대호 박사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매일경제 MBN 한경와우TV SBS-CNBC 글로벌이코노믹 등에서 워싱턴특파원 경제부장 금융부장 국제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또 고려대 경영대와 MOT 대학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중국인민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연락처 02-323-7474 사진은 실리콘밸리 동판 팻말의 내용.
실리콘밸리는 휴렛패커드(HP)라는 전자업체로 부터 시작됐다. HP의 첫 사무실이 있던 팰러앨토 지역의 한 차고 앞에는 실리콘밸리 발상지라는 동판이 서있다. 기획시리즈 김대호 박사의 실리콘 밸리 이야기. 그 발상지를 찾아서.김대호 박사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매일경제 MBN 한경와우TV SBS-CNBC 글로벌이코노믹 등에서 워싱턴특파원 경제부장 금융부장 국제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또 고려대 경영대와 MOT 대학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중국인민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연락처 02-323-7474 사진은 실리콘밸리 동판 팻말의 내용.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대기자/경제학 박사] 오늘날 실리콘 밸리는 IT 산업의 메카로 통한다.

새로운 기술을 향한 청춘의 피가 들끓는 곳이다.
그들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뜨거운 열정이 엔젤 투자와 벤처 자본을 만나 서로 어울리면서 제4차 산업혁명을 꽃을 피우는 역동의 현장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각 지역으로 숱한 인재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실리콘밸리로 몰려들고 있다.

사실 실리콘밸리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서 IT 산업이 왕성한 지역을 통틀어 실리콘밸리라고 부르고 있다. 굳이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캘리포니아 주 샌타클래라 카운티와 그 인근이다. 이곳에는 원래 ‘환희의 밸리’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있었다. 풍치가 너무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로는 Valley of Heart's Delight 라고 불렸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지역에 IT 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몰려들었다. 이후 IT의 주 소재가 게르마늄에서 실리콘으로 바뀌면서 그곳의 이름도 실리콘 골짜기 즉 실리콘밸리로 시나브로 변해갔다.

오늘날 실리콘밸리를 연구하는 경제사학자들은 대부분 샌타클래라 카운티 안의 팰로앨토 시에 있는 한 허름한 거라지(Garage)를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로 지목하고 있다. 정확한 주소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 시 에디슨 애비뉴 367번지다. 영어로는 367 Addison Avenue in Palo Alto, California USA라고 쓴다. 우편번호(Zip)는 94301-2706 이다. 현장에는 실리콘밸리의 발상지 (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동판 팻말이 서 있다.

1938년 휴렛(Hewlett)과 패커드(Packard)라는 두 청년이 바로 이곳에 자그마한 회사를 차렸다. 상호명은 휴렛 패커드 (HP)이다. 휴렛과 패커드 두 창업자의 이름을 나열한 것이다. 이름의 순서는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패커드가 그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으나 일부러 진척하여 뒤로 빠졌다는 설이 있다. 서로 양보하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휴렛은 자동차의 고향 미국 미시간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이자 교수였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의 의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휴렛도 따라왔다. 그 스탠퍼드 대학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한 중앙에 위치해 있다 워낙 어릴 때 이사를 해 태어난 미시간보다는 실리콘밸리에 더 애착이 많다.
휴렛은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휴렛에게는 난독증(dyslexia)이라는 병이 생겼다. 제대로 쓰고 읽을 수 없는 희귀병이다. 글을 몇 자 읽으면 바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상한 병이다. 휴렛은 그 불구의 한계를 노력으로 넘어섰다.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도록 집중해서 듣고 또 오랫동안 기억하는 특유의 방법을 개발해 냈다. 노트 필기를 하지 않고도 우등생에까지 오른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특히 꼭 읽어야하는 역사나 사회 등보다는 원리에 대한 이해를 더 필요로 하는 과학과 기술에서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이킹, 사냥 그리고 낚시가 취미였다.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한때 아버지가 봉직하던 스탠퍼드대학에 진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을 졸업한 플로아 여사와의 사이에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김대호 박사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매일경제 MBN 한경와우TV SBS-CNBC 글로벌이코노믹 등에서 워싱턴특파원 경제부장 금융부장 국제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또 고려대 경영대와 MOT 대학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중국인민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연락처 02-323-7474 사진은 실리콘밸리 연대기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매일경제 MBN 한경와우TV SBS-CNBC 글로벌이코노믹 등에서 워싱턴특파원 경제부장 금융부장 국제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또 고려대 경영대와 MOT 대학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중국인민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연락처 02-323-7474 사진은 실리콘밸리 연대기


패커드는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시골마을 푸에블로 출생이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패커드는 어려서부터 만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가 9세 때 손으로 직접 만든 사제 라디오가 지금도 역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심지어는 화약과 폭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 번은 파이프 폭탄을 만들다가 손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전형적인 범생이 출신이다. 스탠퍼드대 전자공학과를 나왔다. 스탠퍼드대 동창인 루실 여사와의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휴렛과 패커드는 1930년에 처음 만났다. 스탠퍼드대 전자공학과에 같은 해 입학한 것이다. 패커드가 1912년 9월생으로 1913년 5월생인 휴렛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지만 9월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학제에 따라 둘은 동기동창이 된 것이다. 휴렛과 패커드는 스탠퍼드대학 교수이자 당대 최고의 전자공학자로 인정받던 터먼 교수의 수제자로 함께 발탁됐다. 터먼 교수와의 만남은 휴렛과 패커드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터먼 교수는 대를 이은 스탠퍼드 맨이다. 아버지 루이스 터먼은 교육심리학의 석학이다 . 인간의 두뇌를 측정하는 IQ테스트가 바로 그의 아버지가 스탠파드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안한 것이다.

아들 터먼도 스탠퍼드에 진학해 화학 학사와 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부의 아이비리그 명문인 MIT로 옮겨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서부와 동부의 격차는 컸다. MIT 사람들은 서부출신을 촌놈들이라면서 놀려댔다. 스탠퍼드 대학의 학문 수준을 깔보기도 했다. 터먼으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MIT 박사 취득 후 모교 교수로 돌아온 터먼은 동부에서 당한 수모를 갚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스탠퍼드를 아이비리그 명문보다 더 나은 초일류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 그러한 뜨거운 열정으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자질이 있는 학생들은 특별히 연구실로 불러 혼을 다해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 4학년이던 휴렛과 패커드가 터먼 교수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세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실리콘밸리 발상지 차고의 모습이미지 확대보기
실리콘밸리 발상지 차고의 모습


당시 스탠퍼드가 갖고 있던 가장 큰 고민은 낮은 취업률이었다. 우수한 학생을 아무리 많이 배출해도 근처에는 이들을 받아줄 기업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는 공기 좋은 시골 일 뿐이었다.

학생을 제대로 취업시키기 위해서는 스탠퍼드 대학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새로운 기업을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스탠퍼드 대학의 창업 역사는 졸업생 일자리 창출이라는 현실적 목적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창업 운동의 한복판에 터먼 교수가 있었다.

터먼 교수는 가장 아끼던 제자 휴렛과 패커드에게도 창업을 권유했다. 권유라기보다는 강요 또는 명령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터먼 교수는 전자산업의 만물박사였다. 라디오와 전파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 기술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면서 기업을 만들라고 독려한 것이다. 터먼 교수는 두 사람에게 자본금 조로 538달러를 빌려줬다.

그때 패커드는 막 결혼한 상태였다. 월세 45달러로 부부가 함께 살 집을 빌렸다. 패커드와 휴렛은 그 집에 딸린 차고에 회사를 차렸다. 이 차고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탄생지(Birthplace of Silicon Valley)로 지정되어 있는 바로 그 현장이다. 패커드의 차고는 차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변변찮은 공간이었다.
실리콘밸리 발상지 약도
실리콘밸리 발상지 약도


휴렛과 패커드가 여기서 만들어낸 작품이 '200A'라는 이름의 오디오 발진기였다. 특정 음역의 주파수를 생성하는 테스트 장비이다. 불티나듯이 팔렸다. 월트 디즈니가 1940년 영화 판타지아를 찍으면서 HP 제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HP의 실리콘밸리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김대호 대기자/경제학 박사 yoonsk828@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