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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의 세금이야기] 나라를 세우기도하고 망하기도 한 소금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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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의 세금이야기] 나라를 세우기도하고 망하기도 한 소금稅

춘추시대 제나라 명재상 관중, 최초로 소금전매 제도 도입… 당나라의 지나친 소금세는 황소의 난으로 멸망 초래

과거 고대국가의 소금세는 재정수입의 주요 원천이었으나 오늘날 소금은 면세 품목이 됐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이미지 확대보기
과거 고대국가의 소금세는 재정수입의 주요 원천이었으나 오늘날 소금은 면세 품목이 됐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글로벌이코노믹 김대성 기자] 소금은 나트륨과 염소가 동일한 비율로 결합되어 이뤄진 정입방체의 결정이다.

소금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질 중 하나이며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이용된다.
인류가 소금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유목생활을 하던 원시시대에는 우유나 고기를 먹음으로써 소금 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할 수 있었으나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소금을 따로 섭취해야 했다.

중국, 이집트, 페르시아 등 고대 여러 국가에서 소금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고 로마에서는 군인이나 관리의 봉급을 소금으로 줬다.

일을 하고 받는 댓가를 영어로 샐러리(salary)는 ‘병사에게 주는 소금돈’이라는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소금은 고대 국가의 주요한 재정적 기반을 담당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부터 소금의 전매제를 두고 국가가 소금을 관리해 왔다.

기원전 7세기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이었던 관중(管仲)은 중국 최초로 소금 전매를 도입했다.
상인 출신인 관중은 군주 환공(桓公)에게 소금 전매 도입을 권유해 제나라가 춘추오패의 반열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발해를 낀 제나라는 풍부한 소금 생산지였다.

소금 전매는 중국 만리장성 건축의 주요 재원이 될 만큼 왕권에 막강한 부를 가져다 줬다.

원나라는 소금세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전쟁을 할 수 있는 재원을 모았고 소금세가 원나라의 주요 재정 수입원이 됐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때까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소금 생산권을 갖고 재정을 늘려나간 정황이 엿보인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국가가 소금을 모두 관리했고 개인적으로 소금을 만들거나 비밀리에 무역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죄를 다스렸다. 조선시대에도 염장을 설치하고 관이 직접 자염하는 전매제도를 계속하여 시행했다.

과거 서양에서도 소금세는 악명이 높은 세금이다.

프랑스를 비롯해 주요 봉건 국가들이 소금세를 도입해 왕권은 부를 쌓을 수 있었으나 국민들은 높은 세금으로 불만이 높았다.

소금세는 왕권을 강화하는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지만 지나친 소금세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중국 당나라는 극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소금 전매에 의존했고 소금 전매수입이 총 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전매 이전에는 한 말에 10전 했으나 소금 값이 110전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300전까지 달했다.

생존 필수품인 소금 값이 오르면서 가장 큰 피해자인 농민들의 민심이 술렁거렸다. 당나라 왕권이 소금 밀매조직에 가혹한 중형을 내리자 소금 밀매업을 하던 황소가 무장봉기에 나서며 당나라는 멸망의 도탄에 빠지게 됐다.

영국은 식민지로 있던 인도에 과도한 소금세를 부과했다. 인도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통제했다. 인도의 바닷가에서 자연 생성된 소금을 집기만해도 중범죄에 속했다.

가혹한 소금세는 독립운동가 간디의 ‘소금행진’ 이후 인도 독립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의 경우 1630년에 원가의 14배였던 소금가격이 1710년에는 140배가 될 정도였고 프랑스 대혁명을 야기한 원인으로도 꼽힌다.

국가가 전매해 막대한 이익을 챙겨온 소금은 이제 면세 품목이다. 단 소금을 가공한 맛소금에는 10%의 부가가치세가 포함된다.


김대성 기자 kim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