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게임의 원제는 ‘Getting Over It(극복하기)’다. 대체 뭘 극복하라는 걸까. 일단 트레일러를 보시라.
지난 10월 출시된 이 게임은 단적으로 말하면 ‘재미’가 없다. 아니, 애초부터 게이머를 고통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다. 산에는 등장할리 없는 구조물들이 게이머들의 등반을 방해하며 조작은 극도로 어려워 실제 플레이하면 열불이 난다.
제작자의 의도대로 대도서관, 풍월량 등 국내 크리에이터 등은 방송에서 좌절하고 또 좌절했으며 시청자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했다. 굉장히 어렵고 이상한 게임, 이것이 그동안 대부분 게이머들에게 알려진 항아리게임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이 게임은 결코 그 정도의 게임은 아니다.
항아리 속에서 힘겹게 산을 오르는 주인공은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는 원시적인 반문명의 사상을 실천한 그리스의 철학가다. 그는 하나의 지팡이를 들고 온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통속에서 살아갔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거처를 찾아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해 비치는 그 곳에서 비켜 서 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항아리게임은 주류 게임의 문법을 파괴하는 반게임(anti-game)의 성격을 띤다. 디오게네스의 몸을 빌려 산을 오르는 유저들은 우선 당황하게 된다. 성장도, 재미도, 친절하지도 않다. 게임 내내 조롱조로 흘러나오는 베넷 포디의 나레이션에서 이 게임의 창작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몇 년간 사람들은 게임이 조립식으로 만들어질 것이라 했다. 상점에서 구입한 재료를 조립해 만들 듯이.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상점의 재료가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특정 의도에 맞게 만들어지고 그 순간이 지나면 바로 쓰레기가 된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 과정은 몇 초 밖에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인터넷이라 부르는 거대한 디지털 쓰레기 더미에 쓰레기를 퍼부었다. 소비되지 않는 새로운 콘텐츠의 양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 됐다.”
“콘텐츠가 쓰레기가 되면 다시 그 쓰레기는 새로운 매체체가 된다. 디지털 시대의 공용어가 되는 것이다. 이 쓰레기를 이용해 또 다른 쓰레기 콘텐츠를 만든다. B급 게임, B급 영화, B급 음악, B급 철학이다. 아마도 이 자체가 디지털 문화다. 쓰레기로 이뤄진 거대한 산이자 샘솟는 창의성의 잿더미다.”
베넷 포디는 유저들이 플랫폼, 교회, 사제관, 거실, 공장, 놀이터, 공사장, 화강암 절벽, 호숫가 등 무의미한 장애물들을 넘어가면서 깨닫길 원한다. 무의미하게 쏟아지는 콘텐츠들과 이용자들의 콘텐츠 ‘폭식’에 대해서. 콘텐츠는 순식간에 등장했다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소비되고 곧 사라져간다. 창작자들은 더 이상 창작물에 공을 들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얼마 뒤 면 모두가 잊혀질 ‘쓰레기’가 돼 버리기 때문이다.
점점 게임은 쉽고, 편해지기 시작한다. 대충 비슷한 방식으로, 성공 방정식을 철저히 답습한다. 창작자도, 소비자도 게임에 대한 열정을 잃은 지는 한참 됐다. 사실, 모두가 이번에도 쓰레기 같은 게임이 나왔음을 안다. 애초에 쓰레기가 주류가 돼 버린 세상이다.
항아리게임은 게임이란 콘텐츠를 낯설게 한다. ‘이런 것도 게임인가’ 고민하던 유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불편함에 어디서 오는지 모를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오늘이야말로 꼭 깨고야 말겠어’. 이런 의욕을 느껴본 게 언제던가.
베넷 포디는 대충, 쉽게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진 주류(A급)의 찌꺼기(오브제) 들을 긁어모아 B급 게임을 만든다. 게임의 후반부 그는 “바로 버려질 운명이라 하더라도 쉽게 만들 필요는 없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가 수도 없이 제자리로 돌려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유저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종국에는 “여기까지 와줘서 기쁘다”며 “당신에게 이 게임을 바친다. 나의 모든 마음을 담아”라고 속삭인다. 어려운 게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준 유저들을 위한 세레나데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후기 자본주의 성장이 구조적 ‘잉여’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년 신제품이 쏟아지고 소비자들은 강박적으로 새로움에 몰두한다. ‘고급’, ‘하이엔드’, ‘플래그쉽’이라는 말은 지구 어딘가에 ‘구식’, ‘뒤떨어진’, ‘하급’ 등의 상대항을 만들어낸다. 세계는 점점 더 속도를 올리라고 소리치고 있으며 그 속도에 올라타지 못한 이들은 하급품, ‘잉여인간’이 된다. 2년마다 명을 달리하는 휴대폰들, 분명 기능은 멀쩡하지만 신제품이 나오는 순간 금세 쓰레기가 된다.
하루에도 수천 개씩 튀어나오는 신작 게임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탄생시점부터 쓰레기통에 가게 될 운명이다. 새로운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결코 해갈되지 않는 갈증으로 남는다. 우리가 극복(Getting over it)해야 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